또 돈을 놓고 갔습니다.
남의 주머니에 고이 간직한 돈마저 훔쳐가거나 강제로 빼앗아 가는 세상에, 도대체 누가 이러는 걸까요?
그것도 '또' 말입니다.
어제(4일) 오전 전라남도 담양군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돈이 든 상자를 몰래 놓고 갔는데, 상자 안에는 현금 2백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담양 등불장학금 첫 단초로 사용해 주세요"
작은 메모도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지난해 7월29일에도 2억원이 든 토마토 상자가 이곳에 배달된 적이 있습니다.
"골목길에 등불이 되고파, 일찍이 파란 신호등처럼, 그러나 적신호가 행동을 가로 막아 이제야 진행합니다"
담양군청은 두 '사건'을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담양군청은 이 돈으로 '등불장학회'를 만들었는데, 각박한 세상에 참 드문 일이자 훈훈한 미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식을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특히 기자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가 참 궁금합니다.
돈많은 독지가일 수도 있고, 자신은 어렵게 살면서도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선행을 하는 '기부천사'일수도 있을 겁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몰래 선행을 한 그 사람을 굳이 추적까지 해서 찾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궁금하다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조금은 다른 일입니다만,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꼭 1년전인 지난 해 이맘때였습니다.
설 하루 전날 저녁 경기도 안양 인덕원역에 초로의 신사가 찾아와 매표소 창구에 섰습니다.
"용산에서 목포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표 30만 원 어치만 주세요"
열차표 15장을 끊은 그 신사는 곧바로 역무원에게 표 모두를 되돌려 주고 그 곳을 떠나려했습니다.
역무원이 이상히 여겨 무슨 일이냐고 묻자 "청년시절에 무임승차를 한 것이 마음에 걸려 빚을 갚는 거"라고 했습니다.
이 사연이 몇몇 신문에 보도됐습니다. 저는 당시 SBS의 마감뉴스인 나이트라인 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을 찾아서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그런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생겼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작은 일이어도 잘못을 하면 평생 짐이 된다'는 메시지를 젊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수소문 끝에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어렵사리 그 사건의 주인공과 통화가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몇 차례 거절을 했습니다. 우선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는 점을 들었고, 또 자신의 얼굴을 알리려고 한 일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몇 차례 우리의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하자 결국 뜻을 꺾었습니다.
지난해 2월3일 밤 그를 만났습니다. 대전 근교의 한 기도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는 당시 64살의 서정밀씨였습니다.
대전에서 밤길을 달려와 피곤한 모습이었지만,행동이나 말투에서 매우 겸손하고 진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젊은 시절에 무임승차를 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으셨다고 하는데,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갔는데 서울에서 인천으로 통근을 했었습니다. 한 달 정기권을 끊어가지고 다녔는데, 3월치를 다 쓰고 4월치를 새로 끊어야 하는데, 3월을 4월로 고쳐서 한 달을 타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시던가요?
* 처음엔 무심코 넘어갔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몸이 많이 안좋아서 어느 해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를 하던 중 양심이 막 살아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임승차했던 생각이었습니다.
- 근데 왜 30만 원어치 표를 구입했나요?
* 40년전의 일이라, 그 때 한 달치 승차권 요금에 이자가 그 정도는 붙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30만 원어치를 샀죠. 그런데 역무원이 표를 사고 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 표를 사지 못해 피해를 본다고 해서,그냥 표를 안받고 30만 원만 드리고 왔지요.
- 그 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 어렵게 사는 처지라 한 달에 만원씩 30개월짜리 적금을 들었습니다. 적금을 탔는데, 하필이면 그 때 정말 어려운 사람을 만나 그 돈을 주고 말았습니다. 좋은 일을 해서 이제 됐다 싶었는데도 무임승차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지워지질 않았습니다. 다시 한 달에 5만 원씩 6개월짜리 적금을 들어서 마련한 돈이 바로 그 돈입니다.
-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어떻던가요?
* 홀가분해지더군요. 마치 오랜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젊은 시절에 저 처럼 실수한 거 있다면 솔직하게 사죄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삶이 밝아지고 모든 것이 정말 달라집니다.
마치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듯이 서씨는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스튜디오를 떠나면서도 그는 젊은 시절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회개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40년이 넘게 지난 일, 그리고 어찌보면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것이 그의 삶에 그렇게도 큰 굴레가 됐던가 봅니다.
담양의 기부천사가 열차표로 40년 전의 잘못을 회개한 서씨처럼 과거의 잘못 때문에 남몰래 돈을 두고 가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이가 돈이 많은 사람일지, 아니면 어려운 형편인데도 선행을 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다만 툭하면 살인이다 뭐다 해서 살벌한 세태 속에서 그나마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이들이 바로 그런 '얼굴없는 천사'들일 것임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