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프랑스 남부 깐느에 다녀왔다.
세계 최대 음악박람회 MIDEM은 영화제와 함께 깐느가 자랑하는 또하나의 축제다.
80여개국에서 온 뮤지션과 음반업자, 음악팬 수천명이 나흘간 지구촌에 어떤 음악이 유행하고 있는지 살피고 들어보고 즐긴다.
행사 기간 중 200여개의 크고 작은 공연이 열린다.
음악의 장르도 대중음악부터 클래식까지 다양하다.
쇼케이스를 포함해 모든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입장권이 무려 1050유로, 우리 돈 1백7십만원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자들에게도 입장권은 제공되지 않는다.
취재하고자 하는 공연 주최측에 직접 신청해야 한다.
한국 대중음악 쇼케이스가 열린 26일 밤, 마르티네즈 호텔 공연장을 찾았다.
힙합그룹 에픽하이와 유망 여성그룹인 에프엑스가 주인공이다.
공연에 앞서 해변에서 두 그룹 멤버들과 인터뷰를 했다.
이미 유명세를 탄 에픽하이의 타블로는 장난끼를 멈추지 않았지만 질문이 시작되자 이내 진지한 말투로 변한다. 꽤 의미있는 말들을 쏟아냈다.
데뷔한 지 얼마 안되는 에프엑스는 연신 큰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연발했다.
특파원 나오기 전 방송국에서 종종 보던 모습이다.
나한테도 생소한 우리 젊은 가수들을 프랑스에서 누가 보러 올까?
행여 썰렁한 공연이 될까 노심초사했는데 금방 걱정이 풀렸다.
한국 오빠부대를 떠오르게 하는 여학생들이 가수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공연장에 들어섰다.
남자 아이들도 몇몇 눈에 띈다.
이들은 무대 뒤편에서 에프엑스의 모습이 어른거리자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다가가 유심히 관찰하고 말을 걸었다.
근처에 사는 학생들도 있었고 꽤나 멀리서 기차를 타고 온 이도 있었다.
에픽하이를 사랑하고 에프엑스가 너무 예쁘다고 아우성이다.
공연 중에 가수들의 노래를 줄줄 따라 부를 정도로 한국 가요는 이미 이들에게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의 자녀가 한류팬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프랑스에서 서민층이나 빈곤 계층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이민자들, 가끔 높은 실업과 차별 때문에 소요사태를 일으키는 그들 말이다.
프랑스의 한국인 가운데 일부는 이들을 '낙타'라고 부르며 하대하기도 한다.
파리에서 한국 가요팬들을 취재할 때도 유럽계 프랑스인보다는 이민자들이 많았다.
아직까지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얼마나 넓게 한류를 즐기고 있는지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이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한류 매니아들이 곳곳에 있고 즐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또 인터넷 망을 통해 우리 음악을 접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내 생각으로는 한국적인 팝, 한국적인 힙합, 우리 음악의 정서가 유럽계 젊은이들보다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에게 보다 크게 어필하는 것 같다.
이들 상당수가 무슬림으로 어찌보면 자유분방한 우리 대중음악과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한국 가요 좋아하는 사람 손들어 하면 까무잡잡한 피부의 이민자 3세들이 많다.
자유, 평등, 박애를 애써 내세울 정도로 평등하지 못한 프랑스 사회에서 억눌려 힘겹게 사는 이들에게 우리 대중음악은 큰 위안이 되고 있음에 틀림 없다.
종교적으로 엄숙한 삶을 살 지언정 그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흥과 멋'이 우리의 그것과 잘 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프랑스에 건너 온 뒤 3년을 들어도 프랑스 대중가요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결국 정서의 교집합이 작기 때문이 아닐까?
지중해의 따사로운 햇살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 깐느에서의 이틀이 스쳐 지나갔다.
호텔 이곳 저곳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 야자수, 왜소한 체구에도 열정적이었던 타블로, 리듬체조 수준의 댄스를 선보인 에프엑스의 중국계 멤버 빅토리아, 그러나 아무리 되새겨 보려 해도 이들이 부른 노래 한소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의 음악에 깊이가 없어서 인가, 아니면 내가 너무 나이가 들어 버렸나?
이렇게 옛날과는 확 달라진 우리 대중음악을, 제목조차 무슨 암호같은 우리 유행가를 프랑스 젊은이들이 사랑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다.
다음에, 아니면 그 다음에 부임하는 특파원은 파리의 팔레 데 꽁그레 공연장에서 열리는우리 팝 그룹의 공연을 취재하러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