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저는 현지에서 취재를 하면서 이렇게 스탠드업(기자가 얼굴을 내밀고 말을 하는 장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티에 와서 제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치안이 불안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는 함부로 차에서 내리지 마라, 골목길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마라, 밤에는 특히 돌아다니지 마라…."
정말로 그랬습니다. 아이티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도미니카 산토도밍고에서 사업을 하는 분들의 도움을 받았고,들어와서는 국제협력단 소속으로 아이티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의 지원을 받았는데요, 그 분들 모두 저에게 겁을 줬습니다.
"기자님, 특종 욕심으로 함부로 다니시다가는 언제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분들보다 현지 사정을 더 잘안다는 선교사 분들의 얘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가르침 속에 현지 취재를 시작하다 보니 처음 이틀동안은 늘 두려움이 따라 다녔습니다. 특히 지진으로 전기 시설이 모두 고장나는 바람에 해만 지면 칠흑처럼 어두운 세상이 돼버렸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밖으로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창피하지만 사실이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취재한 내용을 뉴스로 내보내기 위해 위성을 이용해야 하는데, APTN이라는 회사를 통해 위성송출을 했습니다. 아이티 국제공항에 있던 이 친구들이 둘째날 찾아가 보니 안 보이는 겁니다. 당황해서 급히 수소문을 해보니 "빌라 크레올'이라는 호텔로 옮겼다는 겁니다. 그 시간이 밤 11시였습니다.
급하게 공항을 나서는 취재진에게 대여섯명의 현지 택시기사들과 현지인들이 달라 붙었습니다. 20불만 주면, 40불만 주면, 50불만 주면 길 안내를 해주겠다는 거였고, 결국 40불에 의사가운을 입은 친구와 계약이 됐습니다.
그 친구가 탄 차가 앞장 서고 저희 차가 뒤를 쫓아가는데 앞은 안보이고, 가는 길은 자꾸 구비구비 산속이고, 가지 말라는 골목길로만 가고, 마침내 마지막 골목에서 저를 비롯한 저희팀 모두가 "여차하면 튄다." 이심전심 하던 차에 갑자기 난민촌 같은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호텔로 가자는데 난민촌이라니, 드디어 우리가 말로만 듣던 아이티의 치안부재 현장에 들어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하지만 길은 외길이고, 돌아나가야 할 길은 오르막….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 신세였는데, 의사가운을 입은 친구가 차에서 내리더니 다왔다는 겁니다. 차 문은 열지도 못하고 호텔 입구는 어디냐고 차안에서 소리쳤습니다.
그 순간, 이 친구가 조금 앞으로 달려가더니 "여기"라는 겁니다. 그 친구 너머 호텔 불빛이 보이는데 거의 현기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긴장과 두려움의 강도가 그만큼 컸다는 거죠. 호텔측에서 앞에까지 밀려드는 난민들을 쫓아내지 못해서 소규모 난민촌이 형성돼 있던 건데, 저희는 그 걸 보고 폭도들에게 우리를 유인해 간 걸로 오해했던 거죠. 돌이켜 보면 가장 긴장했고, 아이티 사람들에게 가장 미안했던 순간입니다.
현지사정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저는 조금씩 아이티의 치안문제를 접근하는 외신들의 보도방식에 의구심을 갖게 됐습니다. 사흘째 되면서부터 저는 난민촌 속으로 들어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시장에도 들어갔습니다. 과장해서 말하면 아이티 사람들은 다 모였다고 해도 되는 곳들이었습니다.
인터뷰와 취재를 하는 동안에 수많은 아이티 사람들이 저희를 에워쌌습니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들의 외침은 자기들의 얘기를 들어달라는 것이었고, 에워쌈은 순박한 시골 사람들의 호기심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이티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일년 내내 더운 나라입니다.특별히 할 일이 있는 사람, 즉 직업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나라인데 대지진마저 엄습했으니 사정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일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피부색이 다른 한국 기자의 등장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난민촌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는 "밤마다 이 곳 저 곳에서 불을 피우고 약탈하고 그런다는데 살기에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그런 일 없어요. 없다니까요."라고 잘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통역을 하던 아이티 친구도 "괜찮다는데 왜 자꾸 이런 질문을 합니까?"라며 아주머니 편을 들더군요.
임시정부 청사에서 흥분한 군중을 만났을 때도 그들은 미국과 유엔,국제사회에 자기들 생각을 전해달라는 요구 이외에 취재진에게 그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티 치안과 맞물리는 단어가 두개가 있더군요. '방화와 약탈'이었습니다. 우선 방화 부분입니다. 실제로 흥분해서 방화를 한 사람들도 있었겠습니다만, 제가 지켜본 바로는 쓰레기를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아직 안깨인 나라다 보니 도처에 쓰레기가 널려 있고, 그래서 밤낮 구분 없이 이 사람들은 쓰레기를 태우더군요. 밤에는 그게 방화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약탈은 이렇게 해석하는 현지인이 있었습니다.
"주로 구호품 배급 과정에서 구호품을 지급받지 못한 사람들이 흥분해서 소요를 일으키곤 하는데,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의 입장도 헤아려 줘야 한다. 두 시간, 세 시간을 기다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받고 자기는 못받았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리고 어느 나라고 나쁜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강도나 도둑이 한국에는 없나? 미국에는 없나? 다 있지 않은가? 그 일부의 행위를 갖고 아이티 사람들을 전부 폭도로 몰아가는게 섭섭하다."
현지에 있는 동안 현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 구호품을 지급하고 돌아가다 현지인들에게 약탈을 당했다는 기사를 써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당사자는 멀쩡하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다니더군요.
가만히 돌이켜 보면 지진 발생 이후 아이티로 몰려간 취재진이나 구조대, 의료지원단 같은 사람들은 한 번도 약탈을 당하지 않았고, 현지 사정을 가장 잘 안다는 선교사분들만 두차례인가 약탈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습니다. 사실 약탈의 대상으로야 저같이 아이티 사정을 잘 모르고 달려간 사람들이 제격일텐데 말이죠.
외신들은 국내 취재진보다 훨씬 일찍 현지에 들어갔고 미군의 보호속에 더 깊은 현장까지 취재했기에 그들이 전하는 소식이 한층 깊이가 있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다만 저 나름대로 가이드의 제한없이 직접 뛰어 다니며 접했던 아이티 사람들에게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는 폭도의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찍은 난민촌의 저 아이들 표정을 다시 한번 보시면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80년 광주항쟁때 현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광주가 폭도들의 소굴인 것처럼 오인하도록 했던 그 시절 보도행태가 불현듯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