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지갑, 불황에도 끄떡없는 동네 먹을거리 '순대'
아이들 참거리나 술안주로 그만인 순대... 입김 호호 부는 겨울철에 더욱 맛이 좋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서민음식 순대... 순대는 숙주나 우거지, 찰밥, 채소 등에 돼지피를 골고루 섞어 돼지 창자에 채워 삶아낸 우리 고유 음식으로 어느 자리에 내놓아도 궁합이 아주 잘 맞는 참 맛난 먹을거리이다.
얼마 앞, 늘상 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순대를 안주 삼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살갑게 나누는 가까운 벗에게 서양에서 만든 소시지가 우리나라 순대 자리를 흘깃흘깃 넘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무슨 소리! 지금 김치, 된장에 이어 막걸리, 비빔밥까지 지구촌 곳곳을 누비고 있는 마당에...
사실, 소시지는 만드는 방법에서부터 순대와 좀 다르다. 소시지는 돼지고기와 쇠고기 등 여러 가지 고기를 소금에 절인 뒤 가루를 내 사람이 만든 케이싱(casing, 소시지 재료를 채워 넣는 얇은 막)에 채워 삶거나 연기로 그을려 만든 가공식품으로 순대와 엇비슷하기는 하다. 하지만 순대는 케이싱을 쓰는 게 아니라 돼지 창자를 쓰며, 고기 대신 여러 채소와 찰밥, 돼지피를 넣어 만든다는 것이 다르다.
영양가 또한 소시지에 비해 우리 순대가 훨씬 뛰어나다. 중국 명나라 때 본초학자 이시진(1518∼1593)이 엮은 약학서 <본초강목>에는 "돼지 내장은 납, 수은, 부자 등 갖가지 독을 풀어주는 우수 건강식품"이라고 적혀 있다. 인산 김일훈이 지은 <본초신약>에도 "돼지피는 빈혈, 심장쇠약, 두통, 어지럼증에 좋다"고 씌어져 있다.
근데, 고기를 훈제해 인공 비닐로 만든 서양 소시지가 자연 그대로 만드는 우리 토종 순대를 이길 수 있다고? 한 마디로 택도 없는 소리다. 지금 지구촌 곳곳에는 웰빙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 웰빙바람 하나만 보아도 가공식품인 서양 소시지가 자연 식품인 우리 순대를 따라잡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니겠는가.
'순대'는 만주어 '셍지 두하'에서 딴 이름
아이들도 즐겨 먹는 순대. 순대는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 그 뿌리는 몽골이다. 중국에 있는 가장 오래된 종합 농업기술서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양피와 양고기를 다른 재료와 함께 양 창자에 넣어 삶아 먹는 방법이 적혀 있다. 칭기즈칸이 아시아와 유럽을 휩쓸 때 병사들에게 돼지 창자에 쌀과 채소를 넣어 말리거나 얼려 갖고 다니게 했다는 것.
이 음식이 순대이다. 그러니까 순대가 세계를 휘어잡는 데 한몫 단단히 한 것이다. 순대는 만주어로 '셍지 두하'(senggi-duha)라 불렀다. 순대 첫 글자인 '순'은 피를 뜻하는 '셍지'에서 나왔고, '대'는 창자를 뜻하는 '두하'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만주에서는 가축을 잡으면 고기뿐 아니라 내장과 뼈, 피, 가죽까지 버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우리나라 순대는 1809년 순조 9년에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엮은 생활경제 백과사전인 <규합총서>와 조선시대 가정백과전서로 집안 살림을 다루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중보산림경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 책에는 "소 창자 안팎을 깨끗이 씻어 한자 길이씩 베고 쇠고기와 꿩, 닭고기를 두드려 온갖 양념과 기름장을 섞어 창자 속에 가득히 넣고 실로 두 끝을 맨 다음 솥에 먼저 물을 붓고 대나무를 가로지르고 그 위에 얹되 물에 잠기게 말고 뚜껑을 덮어 뭉근한 불로 고아 꽤 익은 후 내어 식거든 말굽 모양으로 저며 초장에 써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첫 순대는 지금처럼 돼지 창자를 쓴 게 아니라 소 창자를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순대는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 한반도 곳곳에 있으며, 지역마다 먹는 방법과 만드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아바이순대를, 강원도에서는 오징어 순대를, 충청도에서는 병천순대를, 전라도에서는 암뽕순대를 만든다.
옛말에 '돼지 창자국 자주 먹는 놈은 독약을 먹어도 안 죽는다'고 했다. 여기에 지독한 사람을 보고 '돼지창자처럼 독한 넘'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이 말은 돼지창자가 지니고 있는 엄청난 해독작용 때문이다. 한약을 먹을 때에도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은 돼지고기 또한 해독작용이 강해 막말로 '약발'이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종찬 SBS U포터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송고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