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이 9월 '차이코프스키' 11월 '왕자 호동'에 이어 '백조의 호수', 연말 '호두까기 인형'까지, 2009년 하반기를 바쁘게 보내고 있다. 어제 '백조의 호수' 프레스 리허설을 보고 왔다.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보기는 오랜만이다. 2002년 국립발레단의 일본 공연에서 본 이후로 처음이니 7년만인가. 2002년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입단을 앞두고 있던 김지영 씨의 백조를 봤는데, 어제 프레스 리허설에도 한국 국립발레단에 재입단한 김지영 씨가 백조를 춤췄다. 지그프리트 왕자 역을 맡은 김현웅 씨와 짝을 이뤄서. (원래 이동훈 씨와 파트너였는데, 이동훈 씨의 부상으로 김현웅 씨가 모든 공연에서 왕자 역을 맡게 됐다.)
오랜만에 '클래식 발레'를 보는 기쁨이 컸다. 수년간 여러 발레 작품을 보다 보니, 꽉 짜인 형식에 따라 진행되는 클래식 발레 작품이 어쩐지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백조의 호수'를 오랜만에 보면서, 클래식의 '정제된 형식미'가 큰 매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순백색 튀튀의 발레리나들이 연출하는 백조의 호수 장면은 여전히 질리지 않는 매력으로 나를 끌어당겼고, 왕자의 생일파티, 무도회 장면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춤의 향연은, 잘 차려진 성찬 같았다.
'백조의 호수'의 여자 주역은 청순한 백조 오데트와 요염한 흑조 오딜을 함께 소화해 내야 해서 발레리나들이 탐내면서도 어려워하는 작품이다. 오딜 역은 그 유명한 32회전 푸에테를 비롯해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장면이 많지만, 나는 오데트의 비장한 청순가련미에 더 끌렸던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염한 오딜 역의 매력도 크게 다가왔는데, 이건 그 동안 더 무르익은 김지영 씨의 탁월한 연기력이 이 두 역의 대조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제 국립발레단 발레리노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김현웅 씨 역시 안정된 기량을 보여줬다. 김현웅 씨는 기본 실력이 탄탄한 것은 물론이고 워낙 체격이나 외모 등 조건이 좋아서 무대에서 항상 돋보이는 것 같다. 좀 더 역에 몰입해 풍부하게 감정을 표현해줬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그나저나 이동훈 씨 부상으로 김현웅 씨의 출연 횟수가 늘어나 날마다 왕자를 춤춰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겠다.
왕자 신부감으로 나온 공주들 가운데 눈에 띄는 무용수가 있어 물어보니 마지막 날 주역을 맡게 될 고혜주 씨라고 한다. 이번 '백조의 호수'는 김주원 김지영 김리회 박세은 박슬기 고혜주 이렇게 여섯 명의 발레리나가 주역을 번갈아 맡게 되는데, 관록 있는 선배들과 무섭게 성장하는 신예들이 골고루 섞여 있어 더욱 호기심을 자아낸다.
프레스 리허설을 보고 나서 이번 '백조의 호수' 본 공연을 더욱 기대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바로 광주시향 상임지휘자 구자범 씨가 지휘한다는 점이다. 나는 2006년 당시 독일의 명문 하노버 국립오페라극장 수석 상임지휘자였던 구자범 씨가 한국 국립오페라단의 '투란도트'를 지휘할 때 인터뷰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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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범 씨는 올해부터 광주 시향을 맡아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나는 광주시향이 벌써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얘기를 들은 데다, '투란도트' 이후 그가 지휘하는 공연을 보지 못한 터여서, 이번 '백조의 호수' 지휘를 맡게 됐다는 소식에 많이 반가웠다.
구자범 씨가 어제 프레스 리허설에서 들려준 코리안 심포니의 연주는 (본인은 리허설이 덜 된 연주라며 불만스러워했지만) 내가 최근 국내 발레 공연에서 들었던 연주 가운데 최고였다. 발레 공연에서 춤과 음악을 떼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춤을 보지 않고 오케스트라 연주만 듣는 것만으로도 흡족한 공연이라는 느낌이었다.
풀 곳은 풀어주고, 조일 곳은 조여주고, 절정을 향해 달려가다 폭발시켜 주고, 이렇게 드라마틱한 연주는 탄탄한 작품 해석과 오케스트라 장악력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구자범 씨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그냥 밋밋하고 수동적인 반주에 머무르지 않고,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멋진 음악인지 새삼 깨닫게 했다.
작품 좋고, 캐스팅 화려하고, 다른 발레 공연에선 그냥 접어두고 들었던 경우도 많았던 오케스트라 연주까지 만족스러우니, '백조의 호수'의 전 공연을 다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지금으로선 어제 프레스 리허설 본 걸로 이번 '백조의 호수' 공연 관람을 마쳐야 할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번 '백조의 호수'를 한 번은 더 보고 싶다. (13일(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