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종플루 공포가 전 사회를 뒤덮고 있는데요, 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겐 남의 일에 불과합니다.
직장동료, 고객, 바이어 등과 끊임없이 접촉해야 하고, 일과가 끝나면 회식자리에 끌려가 신종플루 바이러스가 묻어있을지 모를 폭탄주 잔을 웃는 얼굴(?)로 돌려 들이켜야 합니다.
업무중 가끔, 목이 칼칼해 상관에게 얘기하다간, '겨우 감기 증상 가지고 엄살이냐?'식의 면박을 받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퇴근해 집에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제 주변 직장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상황을 설정해봤습니다.
PM 9:00 퇴근
남편 : 어제 회식 이후부터 갑자기 목이 아파. 열도 오르고.
아내 : ….미안한데 여보. 요즘 여관은 깨끗해서 묵을만 하다는데…. 애들이 걱정되서…. (연신, 소독액 분무기를남편에게 뿌린다.)
일반적인 남편들은 아이들에게 뽀뽀하기는 커녕, 저녁 얻어먹기도 힘듭니다. 바로 짐 싸서 나가야겠죠.
가끔씩 버티는 간 큰 남편들은 서재에 틀어박혀 집안 내에서도 격리됩니다.
아내 : 아빠 신종플루일지 몰라. 무서운거야. 절대 가까이 가지마!
아들 : 아빠 신종플루야? 그래도 아빠랑 공놀이 할래.
아내 : 이 자식이!
아들 : 으~앙~
남편 : ….
AM 3:00
몸살에 부대껴 체온계를 재보니 38.5도.
남편 : '이거 진짜 걸린 것 아냐?'
곧바로 근처 거점 병원으로 향합니다. 5만원 정도의 추가 응급실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2차 감염 걱정에 사람이 별로 없는 새벽시간대를 택하죠. 또 새벽에 후딱 검사를 마쳐야 출근에 지장이 없을테니까요.
AM 7:00
출근. 계속 고열에 고생하지만 직장에서 내색조차 못한다.
남편 : '확진 이전에 엄살 부렸다가는 나중에 감당이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그날 따라 하루 종일 찬바람 쐬는 외근이 걸리고…. 회식만큼은 피해보려했지만, "정말 바쁜거야? 미리 약속 고지했잖아"라는 직장 상관의 한마디에 어쩔 수 없이 또 끌려갑니다.
그날밤 여관방 혹은 서재방에서 혼자 고열에 끙끙 앓고 다시 출근.
이후 이틀 뒤 결과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 '음성'이 나왔습니다.
몇번 이 같은 경우 3, 4번 반복되다 보면, 결국 회사에도 용기를 내어 보고하게 되죠.
남편 : 저기 과장님. 오늘 새벽에 거점병원에서 신종플루 검사 받았습니다.
상관 : 그래? 회사 절대 나오지마! 푹 쉬고 몸조리 잘해. 만약 확진 받으면 공과처리 해줄게 (걱정한 것과는 달리 의외로 신속히 처리 됩니다.)
결과1) 결국 검사 결과 '양성'. 이미 애들과 부인도 옮은 상태.
결과2) 다행히 또 '음성'. 하지만 회사에 음성이라고 보고하기 꺼려집니다.
이런 식으로 직장인들은 신종플루로 몸고생, 마음고생 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내색 한 번 하기 어렵습니다.
다음과 같은 반응이 두렵기 때문이죠.
결과2)에 대한 상관 반응
"아무개 대리. 너없는 동안 힘들었어. 다음주는 나도 한 번 검사 한 번 받고 쉬어야겠어. "
별 생각 없이 비꼬던 상관들도 실제로 신종플루 의심 증상을 겪으면, 부하 직원과 똑 같은 고생을 하곤 합니다.
아닌 곳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직장에서 비슷한 '신종플루 에피소드'가 매일 벌어지고 있을겁니다.(감히 확신합니다.)
하지만 신종플루 때문에 생고생 하던 직장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반가운 소식이 지난달 12일에 있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이 직장내 신종플루 감염에 대해 최초로 산업재해 인정 판결을 내렸던 것이죠.
경기도 일산의 모 게임업체에 근무하는 안 모씨 등 직원 2명은 지난 7월 홍콩에서 열리는 게임 박람회에 출장을 다녀왔는데요,
얼마 안 있어, 사무실 옆자리를 쓰던 또 다른 직원 2명과 함께 병원에서 신종플루 확진판정을 받았습니다.
근로복지 공단은 이들 4명이 업무상 신종플루에 걸린 것이 확실하다며 산재 인정 판결을 내리고 병원비와 휴업급여를 주기로 한 것입니다.
이렇듯 신종플루가 산재로 인정된다면, 직장에서의 분위기도 조금 달라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선 더 이상 직장 상사 눈치를 보지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킨 일 하다가 감염된 것이고, 국가가 이에 대한 보상을 명백히 밝힌 만큼 당당히 쉬워도 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질 수 있다는거죠.
또, 상관들도 더 이상 눈치주기 부담스러워집니다. 까딱하면 산재 신청을 묵살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테니까요.
자연히 직장인들은 이번 '산재인정' 결정을 환영합니다.
직장인 : "일단 케이스가 생겨서 좋아요. 이전까지는 휴가 내기조차 힘들었는데, 앞으로는 조금 달라지겠죠."
하지만, 경영계는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인정 결정에 대해 사려깊지 못한 처사라며 즉각 반발했습니다.
[류기정/경총 사회정책본부장 : 신종플루는 일종의 감기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사실 세계 어느 나라도 산재로 인정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산재로 인정하는 것은 향후에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기업에도 많은 부담이 될 것으로 우려됩니다.]
경영계측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미 대유행 단계에 접어든 신종플루에 대해, 산재보상이 남발된다면 자연히 산재 보험료는 인상될 것이고, 보험료 전액을 부담하는 회사에게도 부담이 되겠죠.
또한, 직원들의 병가 신청이 잇따라 정상적인 업무수행에 지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은 나름대로의 '지침'을 마련했습니다.
우선 의사나 교도관 같은 '보건의료종사자 및 집단수용시설 종사자'의 경우->업무 수행 과정에서 신종플루 감염자와의 의미있는 접촉으로 감염된 것이 의학적으로 명백한 경우 업무상 재해로 인정.
이 경우 상당히 산재 입증이 쉽습니다. 신종플루 감염자와 접촉이 있었다라는 것만 증명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일반직장인의 경우는 산재인정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어놓았습니다.(이 대목에서 의료종사자와 일반직장인 사이에 형평성 논란이 일기도 합니다.)
기타근로자(비보건의료종사자)->인정하기 곤란하나 개별사안에 따라 업무 기인성(업무로 인해 감염원에 노출 불가피성)에 따른 업무와 질병 발생 간의 의학적 상당인과관계(신종플루 노출시간, 강도, 범위, 발병시기)가 명확한 경우에 한해 업무상 재해로 인정
첫 대목에서 '인정하기 곤란하나'로 밝힌 것 처럼, 일단 일반직장인을 포함한 비보건의료종사자의 산재인정은 원칙상 어렵다는 것이 지침의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또, 대상의 범위와 단서요건도 달아놓았습니다.
기타근로자의 경우
대상-> *신종플루를 검색하는 공항, 항만 등의 검역관
*신종플루 발생 고위험국가 해외출장 근로자
*기내에서 환자를 돌 본 사람 또는 안면마스크 없이 신종플루 환자와 같은 좌석열 혹은 앞뒤 3열까지의 좌석에서 1시간 이산 비행한 사람
*신종플루에 감염된 동료근로자와 의미 있는 접촉으로 감염된 자 등
요건-> 위 해당근로자로서 아래의 요건에 모두 해당되는 경우
*업무활동의 범위와 신종플루의 전염경로가 일치될 것
*업무수행 중 신종플루에 전염될 만한 명백한 행위가 있을 것
*신종플루에 노출되었다고 의학적으로 인정될 것
*가족이나 친지 등 업무외의 일상생활에서 전염되지 않았을 것
즉, 의료종사자의 경우와는 달리, 일반직장인들의 경우 산재 입증을 위해, 스스로가 '업무상 감염'에 대해 적극적인 증명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 매우 힘들다' 정도로 정리가 되는군요.
여기에, 앞서 '남편'으로 설정했던 한 직장인이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남편 : 꼭 산재보험으로 보상해달라는게 아닙니다. 직장에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 신종플루, A형 감염 같은 치명적인 역병이 돌 때는 회식을 자제하거나 적어도 술잔을 돌리지 않는 분위기.더 나아가 업무 시간 이후에 부하직원과 그 가족만의 시간을 존중하는 분위기. 이런 사원 존중의 문화가이번 난리를 계기로 조금이라도 직장에 뿌리내릴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