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풍수 논쟁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풍수상 경복궁과 청와대가 있는 산은 굉장히 작은 산줄기 선에 있다는 것이다. 경복궁에서 조금 더 측면에 위치한 정독도서관 자리에 궁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정독도서관의 옥상에서 보면, 북한산 오른쪽으로 낙산이, 정 남쪽에는 남산, 왼쪽으로는 인왕산이 위치해 있어 안정적이다. 실제 궁터를 신경 쓴 왕들은 경복궁이 불길한 땅이라는 이야기에 창덕궁 등에서 정사를 보기도 했다.
당대 지관으로서의 자질이 있었던 목효지, 이현로, 최양선. 이들 역시 풍수관점으로 정룡이 잘못됐다는 주장을 펼친 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계유정란으로 수양대군이 즉위함에 따라 이들은 운명을 달리했다. 이현로는 효수당했고, 목효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통지리학자이자 문학 박사인 김연호 박사는 "역사라는 것이 희한하게도 그 말대로 된다."며 "세종 이후에 문종, 단종, 예종까지 약 20년 동안에 거의 자손이 없다"며 풍수의 영향을 언급했다.
궁 터 때문인지, 조선 왕실에서는 진작부터 '장남 왕통 불길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러한 세조에게 첫 번째 타격은 장남이었던 왕세자 의경세자의 돌연한 죽음이었다. 의경세자의 이때 나이 스무 살. 이때가 세조 3년 (1457년) 9월 2일이었다. 풍수가들이 말한 '절사손장자'라는 비극적 예언이 당대로 끝나지 않고 세조의 맏아들에게까지 그 여파를 미친 것으로도 풀이된다.
이에 세조는 죽은 의경세자의 묘자리 선정에 대단한 정성을 기울였다. 경릉, 지금도 관련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명당 중의 명당으로 실측 결과, 능침의 규모가 조선왕릉 40여기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SBS인터넷뉴스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