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고깃국이 나왔네", "아따, 배고파 죽겠는데 빨리 밥 좀 주소", "조금만 기다리면 밥 나올텐데..뭘 자꾸 재촉해요"
노숙자, 영세민 등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급식소에서 식사 배급 전이면 늘 벌어지는 풍경이다.
13일 점심시간을 30여 분 앞두고 경기도 평택시 비전동 재래시장 인근의 허름한 건물 1층에 할아버지, 할머니, 노숙자들이 한둘씩 모여들더니 30평 내부를 금세 채웠다.
'무료급식소. 농산물직거래장터'라는 낡은 현수막이 걸린 이곳에서는 아주머니 6명이 커다란 들통에 금방 밥을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과 무쇠고깃국을 그릇에 푸느라고 바삐 손을 놀리고 있었다.
잠시 후 배식을 기다리던 70여 명은 각자 식판에 반찬 3가지와 밥, 국을 받아 식탁에 앉아 맛있게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색이 바래 후줄근한 작업복 바지를 입은 한 노인이 급식소에 들어섰다.
식사를 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할아버지 오셨어요" 하며 반갑게 맞았다. 이 노인이 바로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채소장수 유수봉(72) 씨다.
이날도 새벽에 서울 송파구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 가 오늘 팔 채소를 1톤 트럭에 한가득 싣고 막 내려오는 길이다.
◇ 하루 500명분 점심에 1년 채소 판 돈 2억 2천만 원 몽땅 투입 = 유 씨가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는 이곳 평택만이 아니다. 같은 경기도 내의 하남, 광주, 용인, 안성에도 그가 꾸려온 무료 급식소들이 있다. 이들 5곳의 급식소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사람은 다 합쳐 하루 500명 정도에 달한다. 유 씨는 채소 장사로 번 돈을 몽땅 이들 급식소 운영비로 털어 넣는다. 이렇게 해온 게 올해로 10년째다.
한 끼 식사비가 1인당 1천500원가량이니, 하루에만 75만 원이 들어간다. 토·일요일을 빼더라도 한 달이면 1천875만 원,1년이면 2억 2천500만 원이 급식비로 나가는 셈이다.
남들은 이윤을 남기려고 장사를 하지만 유 씨는 무료급식소 운영비를 벌려고 채소를 판다.
하남시 재래시장에서 25년 넘게 운영해 온 채소 가게는 3년 전부터 아들(35)과 아내에게 맡겨 놓고 유씨는 3년 전부터 평택으로 내려와 채소가게 2호점을 차렸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서울로 트럭을 몰고 가 채소를 사서 싣고 평택으로 가져와 파는, 고단한 일을 유 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있다.
신선한 채소를 싼값에 파는 데다 채소를 팔아 번 돈을 몽땅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 씨의 채소가게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처음에는 '미친 노인네', '뭔가 꿍꿍이가 있는 사람'이라고 수군대던 사람들이 '이왕이면 좋은 일에 보탬이 되자'며 유 씨 가게의 단골이 되면서 두 가게의 하루 평균 매출액은 700만 원에 달한다. 운이 좋으면 1천만 원이 넘을 때도 있다고 한다.이 때문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유씨가 채소장사로 큰돈을 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문이 작기 때문에 급식소 운영비를 대는 게 빠듯한 형편이다.
유씨의 평택 채소가게 2년 단골인 이현우(44.한식당 운영)씨는 "다른 가게보다 채소값이 싸기도 하지만 할아버지가 무료 급식소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나도 좀 보탬이 되자'는 마음에 식당에서 쓰는 채소 전량을 이곳에서 산다"면서 "이 가게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 저와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유씨는 남을 돕느라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는다. 일반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무한 봉사'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 100억 재산 날리고 어느 날 '알거지'…."아무 것도 없는 이들이 보였다" = 유 씨는 30여 년 전만 해도 안성시에 시가 100억 원이 넘는 큰 땅을 가진 재력가였다.
그러나 "영농 기계화를 해보겠다"며 투자한 돈을 모두 날렸고 "다시 일어서보겠다"며 운영하던 식품공장까지 부도가 나면서 유씨는 나이 마흔넷에 말 그대로 '알거지'가 됐다.
전 재산을 탕진하고 맨몸이 된 유 씨는 우연히 장애인들이 몸이 아파 돈 벌러 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충격을 딛고 일어선 유 씨는 남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품삯으로 쌀 다섯 되를 받아 두 되는 자신이 먹고 석 되는 일 못하는 장애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처음으로 실천한 나눔이었다.
이후 유씨는 품삯으로 받은 돈을 모아 장애인촌에 쌀과 부식을 넣어주기도 하고 겨울철 일거리가 없어 굶는 노동자들을 위해 쌀가마를 나눠 주기도 했다.
그러나 넉넉한 사람들이 쌀가마를 가져가는 것을 보곤 고민에 빠졌다.
'차라리 내가 밥을 해주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린 유씨는 자신이 사는 하남시에 첫 무료급식소를 차렸다. 유씨의 무료급식소 1호점은 이렇게 시작됐다.
◇ "봉사요? 내 살과 뼈를 깎아 다 주는 것이지요" = 유 씨는 10년 넘게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면서 외부 후원금은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우선 내 뼈와 살을 깎아서 하는 봉사를 먼저 하고 나서 정 안 될 때만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주다 보니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통장도 없고 자기 이름으로 된 집도 한 채 없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가족들의 '원망'도 없지 않았다.하남의 채소가게를 운영하며 아버지를 돕고 있는 아들 효근(35) 씨는 "우리집도 못사는데 남에게 주기만 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어릴 때는 원망도 하고 말려도 봤지만 고집을 꺾을수가 없었다"며 "지금은 아버지의 큰 뜻을 이해한 저와 어머니가 '건강이 허락하는 범위내에 열심히 봉사하시라'고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난 내 식구와도 밥상을 같이 하지 않아요. 내가 스스로 어려운 사람의 입장이 돼 봐야 봉사를 하지 내 입에 그들보다 좋은 것 넣고 어떻게 나눔을 얘기하겠어요?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내가 체험해야 봉사하는 진정성이 커집니다" 하루 평균 3천명에게 무료 급식을 하는 것이 가까운 미래에 달성할 유 씨의 꿈이다.
유 씨는 이를 위해 복지재단 설립의 목표를 세워 놓고 있다.
그는 "봉사와 나눔이 바이러스처럼 사회 전반에 퍼지는 일을 죽을 때까지 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처럼 10원 한 푼 없이 두 손만 있는 사람도 모든 것을 사회에 다 주는 데 '있는 사람'이 왜 나누는 것을 못하겠습니까?"
(평택=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