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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냐 창작이냐

만화'쟁이'에게서 온 반가운 전화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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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집은 '많이 아담한' 전형적인 다세대 주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어디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그런 작업 환경이었습니다. 그나마 이 집에 입성한 지도 얼마 안됐더군요. 80년대 후반, 소설가 황석영씨의 제안으로 '장길산'을 그리던 백 선생은 돈이 없어서 지방으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 장길산 열 권 그릴 때까지 거의 삼 년 반이 걸렸어요. (모르긴 해도 만화를 '대량생산'하는 작가들이 하면 6개월이면 떡을 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져서 경기도 광명에 있던 집을 팔아서 시골로 내려갔어요. 거기서 한 2년 살았죠.

어느 만화 평론지에선가 봤는데, 후배들이 백 선생을 '존경'도 아니고 '경외'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세 때문입니다. '생활'에 '창작'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창작'에 '생활'을 맞추는 쟁이 기질 말입니다. 그러나 선생의 식구들은 어땠을까요? 의외로 선생은 대범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 아이들한테는 좋은 경험이 됐어요. 시골 생활도 해보고 했으니까… 집사람은 별로 그렇게 힘들게 하지 않았어요...지금도 마찬가지고....항상 미안하지....

저는 선생의 만화를 처음 보는 순간 가벼운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 동양화도 만화도 서양화도 아닌 새로운 스타일.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왜 이런 만화를 그리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어떤 길을 갔기에 이 길로 오게 됐을까. 이게 팔려고 내놓은 만화책일까. 알고 보니 선생은 상업성이 없는 데서 더 상업성이 없는 데로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선생은 '괴물'입니다.

- 출판사에서 성경 만화를 해보자고 청탁이 왔었어요. 서양식 기법의 성경 만화는 많잖아요.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동양적인 기법의 선을 가지고 성경 만화를 그리면 외국 그림과 다른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겠나 싶어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어요. 종교 만화는 믿음이 좋든가 단순히 돈을 보고 해야 되는데 저는 양쪽이 다 아니었어요. 선을 그을 수가 없었어요. 삼 년 동안 팔이 엄청난 쇠덩이 같이 선이 안 나갔어요. 그러다 보니까 삼 년 동안 정말 죽음 같은 고통만 겪고 겨우 한 권 가까이 끝내고 말았어요.

선생은 삼 년 만에 성경 만화를 포기했다. 이런 완벽주의자라니. 어쨌든 만화를 그리는 것은 그의 생업이다. 그런데 선생은 또 '생활'을 '창작'에 맞춘 것이다.

- 엄청난 고통을 겪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모든 게 자유스러워지더라고요. 그 뒤로는 완전한 자유로움을 얻어서 그림도 정말 자유스러운 그림을 그릴 수가 있게 되더라고요. 그림이 좋은지 안 좋은지 저는 모르겠지만...

모든 걸 포기했으면 그냥 적당히 네모 칸이나 메우며 먹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선생은 좌절마저도 창작을 위한 기회로 승화시켰습니다. '승화'란 고체가 기체가 될 때 이외에도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선생은 어느 날 블로그를 만들어 그림을 올리기 시작합니다.

- 새로운 걸 만들자는 생각으로 그린 것은 아니었어요. 정말 하다가 그림이 안되니까 모든 걸 던져버리고 한 거죠. 옛날에 후배들이 오면 장난 삼아서 싸인 대신에 말이나 닭 같은 것을 그렸던 적이 있었는데, 후배 중 한 명이 선생님 그 그림이 재밌습니다. 블로그 같은 것을 만들어서 올려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보세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넷에 올렸죠. 그랬더니 그전까지는 남성 팬만 많고 여성 팬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여자 분들도 많이 들어와서 보고 좋아해 주시고 하니까 기분이 좋더라고요. 블로그에 그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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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시선들이 내 붓대를 같이 잡아주더라고요. 와서 글을 남겨주시는 시선들이...그 분들의 추임새 속에서 그리니까 흥이 많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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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날카로운 문화적 감각과 통찰력이 묻어나는 인상깊은 칼럼으로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주형 기자는 1995년 SBS에 공채로 입사해 문화부와 SBS스페셜 등 호흡이 긴 기사와 방송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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