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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산책] 산 자를 위한 진혼곡

베르디의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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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의 문화가산책
*공연장 순례와 공연 관련 글 쓰기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현재 공연 취재를 맡고 있진 않지만 공연장 순례와 공연 관련 글 쓰기는 오랫동안 해와서 개인적으로도 애착이 가는 일이다. 하지만 1년간 영국 연수 다녀온 뒤로 미래부에서 포럼 기획이라는 새 업무를 맡으면서 이래저래 공연 관람 횟수도 줄고, 글 쓰기도 시들해졌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좋은 공연을 여러 편 보면서 예전처럼,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럽게 내 속에서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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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디지털포럼이 끝나고 비교적 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물론 서울디지털포럼 행사를 결산하고 가을에 열릴 미래한국리포트를 준비하는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서울디지털포럼을 앞두고 야근, 휴일 근무를 밥 먹듯 했던 때와 비교하면 훨씬 평화로운 시간이라고 할까. 덕분에 지난 한 주는 그 동안 그림의 떡이었던 공연 관람을 몰아서 할 수 있었다. 물론 '바쁜 행사도 끝났는데 왜 매일 늦게 들어오느냐'는 딸의 '태클' 때문에 쉽진 않았지만 말이다.

지난 9일, 고양 아람누리에서 열렸던 베르디의 '레퀴엠' 공연. 함신익 씨가 지휘했고, 지난해 창단된 신생 교향악단 소리얼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고양시립합창단과 부천필 코러스, 그리고 소프라노 김영미, 알토 이아경, 테너 나승서, 베이스 양희준 씨가 참여했다. 고양시립합창단이 지난해 열었던 정기공연의 앙코르 무대다. 6월 호국의 달을 맞아, '호국 영령을 기리기 위한 공연'으로 마련됐다고 한다.

'레퀴엠', 즉 진혼곡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안식하도록 비는 음악이다. 프로그램 북에 쓰여진 대로, 진혼곡은 ‘죽은 자를 위한 안식의 곡이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위로의 노래’이기도 하다. 산 자에게 죽음을 일깨우는 것이 위로가 된다는 이 역설. 산 자여, 잊지 말라. 인간의 삶은 어차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니. 애도하라, 우리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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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의 베르디는 이 곡을 이탈리아 낭만주의의 두 거장 로시니와 만조니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썼다. 베르디는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고 참회하는 인류의 모습을 그리는 데 중점을 두려 했는데, 제 2곡 'Dies Irae(진노의 날)'에서 그려지는 최후의 심판은 과연 그가 의도한 대로, 압도적인 무게로 나에게 다가왔다.

사실 베르디의 '레퀴엠'을 실연으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Requiem Et Kyrie(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Dies Irae(진노의 날)- Offertorio(봉헌문)- Sanctus(거룩하시다)- Agnus Dei(하나님의 어린양)- Lux Aeterna(영원한 빛을)- Libera Me(나를 용서하소서)로 구성된 이 '레퀴엠'은 2곡 '진노의 날'이 전체의 중심을 이룬다. '진노의 날'에 등장한 최후의 심판은 마지막까지 이 곡을 관통하는 주제다.

역시 베르디다. 오페라 아닌 '레퀴엠'이지만, '진노의 날'의 어둠과 구원의 빛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극적인 구성이 마치 오페라를 한 편 보는 듯 했다. 베르디는 '레퀴엠'을 단순히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교회음악으로만 여기지 않고 공연장에서 연주하기 위한 작품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고양 아람누리 음악당은 많은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국내 최고의 음악 공연장'으로 꼽는 곳이다. 좋은 공연장에 좋은 공연. 단 하루로 이 공연이 끝나는 것이 아쉬웠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베르디의 '레퀴엠'을 감동적인 실연으로 즐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인간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롭고, 준엄하고, 영적이고, 극적일 수 있는지를 새삼 느낀 무대였기에.

이 공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기획된 것이니, 시기가 맞물린 것은 우연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진혼곡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고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넋은 이제 '진노의 날'이 묘사한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빛' 아래 평화로운 안식을 찾았을까. 지금 인간 세상은 하루하루가 '진노의 날'인 것처럼, 곳곳에 '죽음이 엄습하고 만물이 진동'하고 있는 것만 같다. 고통이 클수록, 어둠이 깊을수록, 구원의 빛은 더욱 더 밝은 것일까. 그러기를, 제발 그러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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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주]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식견과 지식으로 심도깊은 문화뉴스를 제공해주는 김수현 기자는 1993년 SBS 공채 3기로 입사한 베테랑 방송기자입니다. 사회부,정치부를 거쳐 문화부 공연담당 기자로 오랫동안 활약했고 영국 연수를 거쳐 지금은 미래부에서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다양하고 폭넓은 문화계 인맥과 정보가 어우러진 개인블로그도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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