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부 박병일 기자입니다.
'도루묵'이라는 생선에 대한 일화를 아실 겁니다. 임진 왜란 당시 선조가 피신가 있는 동안 '묵'이라는 생선을 먹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더라는 겁니다. "이 생선 이름이 뭐냐?"고 묻자 신하가 "묵이라 하옵니다"라고 답하더라는 겁니다. "이렇게 맛있는 생선의 이름이 묵이 뭐냐? 앞으로는 '은어'라고 불러라"했다지요.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다시 궁궐로 돌아온 선조는 진수성찬에 지쳐 있을 즈음,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으려고 '은어'로 된 음식들을 시켜 먹지만, "왜 이리 맛이 없냐? 도루 '묵'이라고 해라" . . . 그래서 도루묵이 됐다는 겁니다.
느닷없이 웬 도루묵 타령이냐 하실 텐데요. 지금 한나라당 쇄신논란이 딱 그런 상황입니다.
사막에서 한 방향으로 똑바로 걸으면 결국에는 제 자리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오른발과 왼발의 보폭의 미세한 차이 때문에 결국에는 한 바퀴를 돌아 원점에 오게 된다는 거지요. 한나라당 쇄신론은 갈 지 자로 걷다가 아니,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어느 날 정신 차려 보니 다시 제자리로 와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혹자는 "무슨 소리냐? 당 대표가 6월 말까지 조건부 퇴진의사를 밝히지 않았느냐?" 그리고 "당 쇄신특위도 이제는 공천문제나 국회 운영제도 개선 문제, 당정청 소통 문제 등 논의를 하고 있지 않느냐?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국민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국민들이 그런 미세한 변화를 보면서 "아~ 한나라당이 엄청나게 변했구나"라고 생각할까요? "난 원래 한나라당 지지자였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잠시 나도 몰래 곁눈질을 했었는데 이제는 한나라당으로 되돌아가야지" 이렇게 마음을 다잡을까요?
한나라당 쇄신파와 당 지도부, 그리고 친이계와 친박계가 서로 열심히 상대편 네트로 공 넘기기를 하고 있습니다. 족구 게임을 연상케 합니다. 열심히 공을 차 넘기다 보면 누군가 네트에 발이 걸리거나 헛발질을 하겠지요. 그럼 잠시 힘의 균형이 깨져서 팽팽하던 족구 게임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정신 차려 반격하면 다시 균형이 유지되고... 결국 시이소오 게임이 반복됩니다.
족구 게임은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들 모두 재미라도 있죠. 국민들이 한나라당이 지금 벌이고 있는 족구 게임을 보면서 재미를 느낄까요? 감동을 느낄까요? 물론 처음에는 눈길 좀 끌었죠. "이제, 누구하고 누구하고 한판 붙는 거야. 그럼 누가 이길까?"라며 술자리의 화제 거리가 조금 됐긴 했어요. 지금은 한나라당 쇄신 얘기를 안주거리로 꺼낼라치면 술맛 떨어진다고 타박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쇄신론은 이미 초반부터 계파 싸움으로 변질되면서 이제는 '정치 게임'이 돼 버렸습니다. 그것도 무지하게 재미없고 짜증나는 '게임'으로 말입니다. 한나라당 의원들 모두가 해법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 해법은 놔 둔 채 변두리만 더듬고 있습니다. 청와대와 정부, 당 등 여권 전체를 놓고 볼 때, 천원으로 막을 것을 천만원 들여서도 못 막을 해법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은 양 손에 잔뜩 모래를 쥔 채 백사장 바닥에서 옥석을 가리려 합니다. 모래를 버리고 옥석을 가려 찾은 뒤 모래를 다시 쥐면 될 터인데도, 그러질 못합니다. 손에 있는 모래를 버리지 못해 옥석조차 더디게 찾고 있습니다. 그나마 손에 쥔 모래도 술술 빠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한나라당 창당 이래 최대 위기의 하나였던 탄핵 사태를 한나라당은 천막 정신으로 극복했습니다. 탄핵의 오만에 등을 돌렸던 국민들이 처음에는 "또 쌩쑈 하는구나"하고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마음을 열었습니다. 한나라당은 이미 탄핵 사태 때 한번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지혜를 지금은 스스로 외면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나라당은 탄핵 이후 최대 위기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묵'이 '은어' 맛 이어야 할 상황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나라당에게는 '묵'은 '도루묵'일 뿐입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는데, 한나라당의 입맛은 여전히 궁궐이고 여기저기 밥상위에 반찬만 잔뜩 올려 놓으려 합니다. 그것도 한 쪽이 올려 놓은 반찬을 다른 쪽이 치우고 또 그 반대의 경우를 반복합니다. 밥은 식어 갑니다.
손 안에 든 모래부터 버리지 않는다면 한나라당은 돌 속에 섞여 있는 옥돌을 골라 낼 수 없을 겁니다. 손에 쥔 모래조차 다 잃을 겁니다. 잃어버린 모래 언제든 다시 쥘 수 있다는 오만도 보입니다. 방향타를 잃은 한나라당 쇄신.. 국민의 눈 높이에 맞추지 않는다면 살아 남기 힘들 겁니다.
[편집자주] 10년전 '출동 코끼리 기자' 또 '박병일 기자의 현장출동!' 등에서 맹렬하고 거침없는 시사고발 취재로 이름을 날렸던 박병일 기자는 현재 차장이 되어 정치부 여당팀의 현장팀장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제는 연륜까지 더해진 깊이있는 정치 기사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