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장자연 사건으로 순위 10위까지의 대형 연예기획사들이 공정거래위원회의 강력한 조사를 받고 불공정 행위에 대한 시정조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1위부터 30위까지 20여개 중소형 기획사들이 똑같은 조사를 받았는데요. 결과는 아직까지도 '노예계약서'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20개 기획사에 소속된 연예인 230명의 전속계약서를 조사했더니 모든 계약서에서 1건 이상의 불공정 계약 조항이 나왔다고 공정위는 밝혔습니다.
무리한 계약 조항을 유형별로 살펴볼까요.
1. 사생활과 의사결정의 과도한 침해 (기획사는 '갑', 연예인은 '을')
* 갑이 을의 사생활, 건강, 예절, 복장, 교육 등에 관한 조정권과 의무를 갖는다.
* 을은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항상 갑에게 통보하여야 한다.
* 을이 출국할 경우 사전에 갑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 을은 자신의 관리 및 모든 계약 통제 조정권을 갑에게 일임.
2. 직업 선택의 과도한 제한
* 계약기간 중 갑의 허락을 받지 아니하고 연예활동을 중지, 은퇴할 수 없다.
(노예 계약 냄새가 조금 나죠? 개인적으로 이 약관이 제일 기분 나쁩니다. 마치 예전 미국 영화에서 노예에게 '죽어서야 농장을 나간다'는 말을 해대던 농장주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3. 기획사 홍보활동 강제 무상 출연
* 갑의 회사를 홍보하는 광고,홍보물의 경우 수익 분배를 청구하지 못한다.
* 갑 또는 계열사 행사에는 무상으로 출연해야 한다.
(어디까지가 홍보활동인지...장자연 사건처럼 술집에 불려 나가는 것도 '홍보'라고 우기면 홍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부당하죠. 또 회수에 상관없이 무상으로 나와야 한다라는 것도 웃기죠.)
4. 연예인 사전동의 없이 권리 양도
* 갑은 제 3자에게 계약 당사자로서의 지위를 양도할 수 있으며, 을은 이를 승낙한다.
(이것도 일종의 '노예 계약'입니다.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옆집에 주는것도 아니고... '너 저기 가서 일해'라고 일방적으로 지시할 수 있다는 거죠)
그 외 조항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정말 이런 조항으로 계약을 해?' 라는 의문이 정도로 '말도 안되는' 내용들이 많더군요.
물론 기획사 측도 할 말은 있습니다.
신인이라고 찾아와서 시키면 다한다고 해서 회사돈 들여 키워놓고 나면 나중에 훌쩍 떠나면 기획사는 뭐가 남느냐는 거죠.
뽑아 먹을 건 최대한 뽑아 먹어야 한다는 논리...그 쪽 얘기 들어보면 조금은 이해도 되는 면이 있습니다. 비단 우리 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고, 일부는 기사화나 영화화도 됐었으니까요.
이런 비슷한 경우는 지난 2006년 공군과 공사출신 조종사 간에도 벌어졌었죠.
수억 원 들여 전투기 조종사로 키워놨더니 좋은 조건의 민항사로 간다고 해서 의무 복무기간을 늘리느니 마느니...소송을 하느니 마느니...투자한 만큼 뽑는 건 영리회사의 당연한 생존 권리입니다.
하지만 연예인은 '사람'입니다.
사람으로서의 대우는 기본으로 받아야죠. 물건이 아니죠. 물론 그래도 좋으니 연예인으로 키워달라는 절박한 신인들이 많을 겁니다. 이럴 때 '갑'이 나서서 최소한 '이 정도는 지켜주겠다'라고 먼저 나설 수 있는 분위기, 정말 불가능할까요?
일단 장자연 사건을 계기로 한국연예제작자협회와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는 지난 4월 17일 표준약관을 공동으로 준비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람대접하며 사업할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인데요, 공정위원회는 6월말까지 이 표준약관을 제정하고 보급하겠다는 목표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적발된 기획사들은 모두 불공정조항을 자진시정하고, 대부분 표준약관이 만들어지면 자체 약관 대신 표준약관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다고 하네요.
물론 시장 원리에 따라 공급이 훨씬 많으니 수요쪽이 '갑'이 될 것이란 예상은 어렵지 않겠지만, 많은 연예인 지망생들을 적어도 더 이상 '노예'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간의 '신뢰'가 정말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강호동의 '**팍 도사'란 프로그램에서 영화배우 이준기씨가 출연했는데 데뷔 때 자기를 뽑아줬던 매니저와 어려울 때부터 최고의 스타가 된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던데,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감동이 아니라 일상이 될 수 있다면 '노예 계약서'는 저절로 없어지겠죠?
[편집자주] 경제부 산업팀에서 활약 중인 홍순준 기자는 삼성.LG등 전자업계와 공정위, 소비자원을 출입하고 있는 고참 기자입니다. 1995년 입사 후에는 사회부, 정치부 기자로 잔뼈가 굵었고 사건팀의 리더인 '시경 캡'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특유의 돌파력과 폭넓은 취재로 보내오는 기업 내면의 깊은 이야기들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