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뉴스

'미움' 버린 노무현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마침내 '미움' 털어낸 노무현


구글 선호 소스에 SBS뉴스 추가

제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계기는 88년 청문회였습니다. 88년 서울올림픽이 10월1일 끝난 직후부터 국회에서는 '5공 비리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린 이 청문회의 첫 증인은 장세동 씨였습니다. 장세동 씨는 '12.12 군사반란' 의 주역으로 전두환 집권 시절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역임한 '5공화국의 2인자'였습니다. 당시 통일민주당 초선의원인 노무현 전 대통령은 송곳 같은 질문과 정연한 논리로 노회한 장세동씨의 진땀을 흘리게 해 국민들에게 통쾌감을 선사했습니다.

당시 TV 시청률이 60%를 넘을 정도로 국민의 관심이 높았기 때문에 무명이었던 노무현 의원은 청문회 한번으로 완전히 '스타'가 됐습니다. 저는 이후 '인간 노무현'에 대해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됐고 2005년엔 '모택동이 본 박정희와 노무현'이란 저서까지 출간했습니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노무현을 정의하는 키워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미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광고
광고 영역

어린 시절 그는 가난이 미웠고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부모가 미웠고 돈 좀 있다고 자랑하는 부자들이 미웠습니다. 인권 변호사가 돼서는 검찰이 미웠습니다. 힘 약한 서민에게는 한없이 군림하면서도 권력의 '충실한 개' 역할을 하는 검사들이 미웠습니다. 정치인이 돼서도 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인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과 '3당 합당'을 한 김영삼이 미웠고 불의와 타협해 금배지를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선배 의원들이 미웠습니다.

노무현이 정말 증오한 것은 지역주의였습니다. 아무리 '깜'이 안 돼도 영남에서 '김영삼당' 호남에서 '김대중당'으로 출마하면 무조건 당선되는 지역감정의 벽이 미웠습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무시하고 문어발식 확장에만 혈안이 된 부도덕한 재벌 역시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장인의 전력까지 들먹이며 사사건건 자신을 공격한 보수언론,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고 노골적으로 깔보는 위선적인 지식인들, 영어 좀 한다고 으스대는 친미주의자들, 꽃다운 두 여학생을 장갑차로 깔아뭉개고도 진정한 반성을 보이지 않는 미국정부, 이 모두가 노무현에게는 분노의 원천이었습니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된 뒤에도 미움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이 땅의 기득권층과 격렬한 투쟁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전략은 '부전승' 즉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것이고 최하는 싸우고 지는 것입니다. 노무현은 싸우면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웠습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영어 못해도 어떤 차별도 없이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서였습니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바보입니다. '국부'라 불리는 이승만 대통령이 4.19 혁명으로 하야했을 때 우리 국민은 "영구 독재는 안 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역사의 교훈을 무시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아끼는 부하에게 피살되는 불행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전두환이 백담사로 유배를 떠나고 그와 그의 친구 노태우가 수의를 입고 법정에 나란히 섰을 때 '군사 쿠데타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럼 노무현의 죽음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요?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논어에서 증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가 죽을 때는 슬픈 울음소리를 내고 사람이 죽을 때는 훌륭한 말을 남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에는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인간 노무현은 63년 길지 않은 생을 마치면서 마침내 '미움'을 털어버렸습니다.

노무현이 그토록 싫어했던 기득권층도 이제 노무현에 대한 '미움'을 끝내야 합니다. 노무현이 평생 가슴에 품었던 그 '미움'은 차별과 무시, 반칙과 특권, 기회주의, 혈연, 지연, 학연으로 얽힌 한국 사회와 역사가 제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증오의 시대'를 마치고 '화합의 시대'를 여는 것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의 하늘 아래에서 몸을 던진 전직 대통령이 겨레에게 남긴 소중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광고
광고 영역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편집자주] 뛰어난 박학다식과 달변으로 SBS의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권종오' 기자.. 1991년 SBS 개국부터 일해 온 스포츠취재팀의 최고참 기자입니다.  인문학 고전 연구와 대학원에서의 중국 지역 연구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에는 유려한 개막식 중계 해설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2005년에는 심도있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저서 '모택동이 본 박정희와 노무현'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광고
광고 영역
광고
이 시각 인기기사
기사 표시하기
많이 본 뉴스
기사 표시하기
광고
광고
광고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