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금융시장이 다시 불안해지면서 '원화 약세, 달러 강세'의 고환율 유령이 재출현하자 기업들이 또다시 바짝 긴장하고 있다.
지난해 환율 급등 때에는 가격경쟁력이 덩달아 커지면서 혜택을 누렸던 수출기업들도 이번 환율 상승은 그다지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세계 경기침체로 글로벌 수요가 급감하면서 수출시장이 꽉 막혀 환율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탓이다.
되레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불확실성만 커지면서 이래저래 고민만 깊어지고 있다.
다만, 이미 환율 요동으로 홍역을 치른 뼈아픈 경험으로 내성이 생긴 때문인지 지난번 환율충격 때보다는 상대적으로 차분한 편이다.
◇ 원자재 수입의존 기업들 '납빛' = 지난해 환차손으로 적자를 기록한 항공업계는 연초 예상과 달리 또다시 환율이 급등하자 얼굴색이 납빛으로 변하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올해 경영 목표를 세우면서 환율을 1천200원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이미 1천400원을 넘어선 환율은 1천500원 선까지 넘보고 있기 때문이다.
항공사 관계자는 "권투로 비유하면 KO로 쓰러지기 직전에 한 대 더 맞은 상황이다"며 "지난해부터 긴축 경영을 하고 있어 더는 줄일 것도 없지만, 최대한 줄이고 아끼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환율이 10원 오를 때 각각 200억 원, 78억 원가량 손해를 본다.
그나마 항공업계는 대부분의 달러 비용을 차지하는 유가가 45달러 안팎에서 유지되고 있고, 금리도 낮은 상황이라 환율로 손해를 보는 부분을 어느 정도 만회하고 있다. 항공업계가 연초 예상한 유가는 75달러 수준이었다.
최근 국내 항공 수요가 줄기는 했지만, 작년부터 꾸준히 해외영업을 강화한 결과 외국인 승객이 느는 것도 달러 확보에 보탬이 되고 있다.
환율변동위험에 노출된 정유업계도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고 있다.
지난해 수출로 얻은 이익을 고스란히 환차손으로 까먹은 아픈 기억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유업계는 환 관리에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을 쓰고 있다.
SK에너지는 1원의 등락에 따라 30억 원 가까운 환차손익이 발생하는 구조이다.
SK에너지는 환 관리 협의회와 산하 실무위원회를 두고 국제 금융시장 동향에 맞춘 환 운용 전략을 수립해 시행 중이다.
다만, 작년부터 이어진 유가 하락에 따라 외환위험노출이 줄었고, 유가하락폭이 환율 상승폭보다 큰 상황은 그나마 환 변동 충격을 줄이는 데 일조하고 있어 안도하고 있다.
원자재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식품업계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올해 경영계획을 세울 때 환율 수준을 1천200원으로 잡았었다.
식품업계는 통상 환율이 100원 오르면 1천억 원의 환차손을 보게 되는데, 현재 환율이 1천400원으로 급등했으니 2천억 원 정도의 손해를 보게 된 셈이다.
CJ제일제당 측은 "1-2월은 설 명절이 있어 식품업계에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고 예년에는 이 시기 매출로 수입을 확보한 상태에서 출발했는데 올해는 1월부터 마이너스 2천억 원의 손실을 안고 영업을 시작해야 하니 너무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해운업계는 수입과 지출 대부분을 외화로 결제하기 때문에 환율 급등에 따른 충격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그러나 경기 침체가 길어지면서 수출입 화물이 줄고 있어 간접적인 영향권에 들어 있는 상태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회계 방식도 바뀌어 환율 변동에 따른 손익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됐지만. 급격한 환율 변동이 금융과 실물 경기를 악화시키면 물류산업 전반에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내수업종인 제약업계도 원료나 완제품을 수입하는 업체가 많아 환율인상으로 말미암은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해외 신약 의존도가 높은 제약사들은 지난해 하반기에 영업이익률이 20% 이상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대웅제약은 환율이 1% 오를 때마다 원가가 0.2% 상승해 다른 업체들보다 환율상승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해외 신약 비중이 높은 보령제약이나 수입원.부자재를 쓰는 수액 주사제 생산이 많은 중외제약 관계사도 환율의 영향에 민감한 업체로 분류된다.
◇ "달갑지 않다" 수출기업도 '한숨' = 수출 비중이 큰 전자업계는 일반적으로 다른 통화에 대비해 원화 환율이 오르면(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해외시장에서 유리한 측면이 많다.
일본 등 외국업체들보다 LCD와 반도체 등 주요 제품 가격 경쟁력이 커지고 원화 환산 이익도 늘어나는 구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다르다는 게 전자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세계 경기침체로 글로벌 수요 자체가 상당 폭 줄어든데다 외환시장의 변동성도 커 그다지 환율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예전에는 '원·달러 환율이 100원 오르면 영업이익이 9천억 원 늘어난다'는 식의 추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요즘은 세계적으로 외환·금융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다 실물경기도 나빠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따지기 매우 어려운 시점"이라고 말했다.
남용 LG전자 부회장도 최근 기자 간담회에서 "달러 기준으로는 작년 11월~올해 1월 10∼20%가량 매출이 줄었는데, 원화 기준으로는 오히려 늘어나는 '착시현상'이 있다"며 "환율이 다른 경쟁국에 비해 좋아 위기를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이것(환율)이 언제 독약으로 돌아올지, 폭탄을 든 기분"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한 바 있다.
아울러 비중은 많이 줄었지만, 일본으로부터 수입해 쓰는 부품이 여전히 많아 엔화 강세에 따른 수입 비용 증가도 걱정거리다.
원화 환산 외화차입금이 늘어나 재무상 손실 규모가 늘어나는 것도 전자업계로서는 부담이다.
대표적인 수출 품목인 자동차 제조업계도 마찬가지다.
환율이 상승하면 매출이 늘어나는 혜택을 보지만, 환율이 지나치게 오르면 그만큼 수입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기 때문에 고민이다.
특히 글로벌 수요 급감이라는 위기를 맞은 자동차 업계로서도 비용 상승으로 자동차값을 올릴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리면 판매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만큼 환율 변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철강업계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원자재 수입 가격의 탄력성이 철강 제품 가격 탄력성보다 낮아 환율이 뛰면 고스란히 이익을 날려보낼 수밖에 없는 탓이다.
이에 따라 포스코는 매출의 30%가량을 차지하는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원료 구매에 쓰는 전략으로 환율 변동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고환율이 장기화하면 비용 상승 압박이 커질 수 있을 것으로 포스코는 우려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