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열자 담장을 훨씬 웃자란 대나무가 바람에 서걱이는 마당이 펼쳐졌고, 좁지만 기다란 마당 안쪽 깊숙이 한옥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당. 아아..마당. 어쩌면 한옥의 요체는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면 비를 듣볼 수 있고 눈이 오면 그 소리없는 낙하를 완상할 수 있는.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 세상에, 지하철 성신여대 역 근처에 그렇게 한옥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옥은 역시 드러내는 집이 아니다. 요즘 서울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르는 유리의 성들처럼.
겨울이라 피터 바돌로뮤씨의 한옥의 전면(前面)은 탈부착이 가능한 방한(防寒) 구조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당에는 크기가 조금씩 다 다른 돌들이 깔려있었는데, 바로 옆 한옥이 헐릴 때 그냥 버려지는게 아까워서 피터씨가 가져온 구들장이라고 했다.
부끄럽게도 구들장이 그렇게 생겼는지 처음 알았다.
방송에서는 티가 안났지만 피터씨의 한옥은 낡고 다소 방치돼 있는 상태였다.
서울시의 재개발 구역 고시를 철회하라는 행정소송 중이긴 하지만 언제 재개발로 헐릴지 불안해 돈을 많이 들여 고칠 수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이게 무슨 아이러니일까.한국인들은 한옥을 부수려 하고 미국인은 지키려 하고.
몇해 전 덴마크에 출장갔다가 한 한국인 가정집에 수차례 드나들게 됐는데, 그 집 역시 무척 오래된 낡은 집이었지만, 집주인이라도 함부로 고치지 못했다.
법이 그렇다는 것인데 그 사람들은 오히려 마루가 삐거덕 거리는 고택에 사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60년대 후반 평사봉사단으로 한국에 왔다가 눌러앉아 살게된 피터씨는 외국인들 한국에 와서, 서울에 와서 뭐 볼 게 있냐고 솔직하게 말했다.
남산 한옥마을? 민속촌? 그는 코웃음 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옥 마을에 사람이 사는가? 민속촌에 산다는 사람 못들어봤다.
지난해 한 미술인이 서울시의 디자인 도시 드라이브, 특히 도시의 맥락에 대한 성숙한 고민없이 멋진 디자인이라며 자꾸 새로운 것을 지어대는 행태에 대해 그런 건 도시의 영화 세트장화와 비슷하다는 취지의 글을 쓴 걸 보고 깊이 공감했다.
30여 년전만 해도 90만 세대나 됐던 서울의 한옥이 이제 겨우 천3백여 세대만 남았다는 것도 피터씨로부터 들어 알게 됐다. 아마 그 반의 반의 반만 남았어도 디자인 서울이다 뭐다 난리를 치지 않아도 외국인들이 서울에 와서 볼 게 많았을 것이다.
피터씨와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대목은 사실 한옥에 대한 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창조해낸 '시민 사회'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설날 즈음해서 한옥 관련 인터뷰하러갔던 내가, 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재개발이란 건 최초부터 정부 계획입니다. 정부가 벌써 2004년도에 주민들하고 아무 상의 없이 자기네들이 우리동네 재개발하겠다는 예정 지정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정부가 동네 보고 '너희들이 살고있는 방법으로 하면 안된다, 정부 계획대로 살아야된다' 하는 이런.."
[편집자주] 날카로운 문화적 감각과 통찰력이 묻어나는 인상깊은 칼럼으로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주형 기자는 1995년 SBS에 공채로 입사해 문화부와 SBS스페셜 등 호흡이 긴 기사와 방송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