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방화(2006년 4월), 낙산사 산불(2005년4월), 숭례문 화재(2008년2월)….
최근 들어 우리 민족의 귀중한 국보급 문화유산들이 인재 또는 천재로 소실되는 일이 1∼2년에 한 번꼴로 거듭됐으나 문화재 관리 대책은 항상 `땜질식 처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관계 당국은 작년 발생한 숭례문 화재 직후 문화재 방재 관련 예산을 크게 늘리고 방재 매뉴얼(업무지침)을 손보는 등 문화재 관리의 중요성에 눈을 뜨는 듯했다.
문화재청은 1일 "올해 문화재 방재예산이 359억원으로 작년보다 두 배가량 늘었고 중요문화재 경비인력도 70명가량 보강했다"며 1년 전보다 훨씬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
그러나 숭례문 화재 1주년을 맞아 연합뉴스 사건팀이 서울시내 곳곳의 중요문화재들에 대한 관리실태를 취재한 결과 시설과 인력은 보강됐으나 '내실'은 그리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다.
◇'무용지물' 검사대..곳곳에 담배꽁초 = 지난달 30일 오전 11시께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종묘.
유네스코(UNESCO)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는 전 구역이 금연구역으로 설정돼 있다. 문화재 대부분이 화재에 취약한 목조건물이기 때문이다.
입구에는 `인화성 물질 반입을 금지하오니 관람객들은 소지품 확인에 협조해주십시오'라는 안내판이 설치된 검사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숭례문 화재 사건을 계기로 방화로 이어질 수 있는 인화물질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취지로 마련한 시설이었다.
그러나 실제 검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관람객들의 소지품을 검사하는 직원도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검사대만 마련해 놓고 검사는 하지 않는 것이다.
영녕전 주변 산책로, 재궁 주변 호숫가, 정전 근처에 자리잡은 화장실 옆 쓰레기통 등 종묘 안 곳곳에서 담배꽁초가 발견됐다.
자칫 문화재 소실로 이어질 수 있는 흡연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고 제대로 제지되지 않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종묘 관리소 관계자는 이에 대해 "종묘가 지하철 환승역에 위치해 산책나오는 시민이 많다"며 "아무래도 잘 모르고 담배를 피운 것 같다. 밖에서 피우고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보물 1호인 흥인지문(동대문) 주변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1년 전에 비해 분명히 관리가 강화되긴 했다. 숭례문처럼 일반인들의 접근이 쉬워 범행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지 적외선 감지장치, 소화전 등이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종로구는 숭례문 화재사건 직후 50∼60대 초반의 경비원 7명을 새로 투입, 2∼3명이 번갈아가며 24시간 흥인지문 주변을 감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변을 순찰하는 경찰관들은 "겉으로는 경비시스템이 크게 강화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 경비상황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며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했다.
한 경찰관은 "취객들이 흥인지문에 올라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도 경비원이 나와 보지도 않았다"며 "우리가 직접 사진을 찍어 구청에 보내 항의하려고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곳을 지키는 경비원들이 대부분 고령의 단기 계약직이라는 점도 문제다.
'노인 일자리 창출'이라는 차원에서 채용된 단기 계약직 노년층 직원들이 중요 문화재를 얼마나 책임감 있게 관리할지 의문이라는 것이 주변을 경비하는 경찰관들의 걱정이다.
◇"전시용 아닌 내실있는 대책 필요" = 최근 문화재청은 숭례문 화재 1주년을 앞두고 흥인지문 등 전국 중요 목조문화재 151건에 대한 안전점검을 벌였다.
이 조사에서 창덕궁은 소화전이 낡아 작동이 불량하다는 지적이 나왔고, 경복궁은 옥외소화전, 소화기의 추가배치 등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는 등 분야별 지적사항이 전기 65건, 소방 60건, 가스 53건, 산불 4건이었다.
관리를 강화한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1년이나 지나고도 허점이 수두룩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사고가 날 때마다 포장만 화려한 전시용 대책을 내놓는 지금까지의 대응 방식으로는 제2의 숭례문 화재를 막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고건축 학자인 김홍식 명지대 건축학부 교수는 "이제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방화 등의 인재에도 대처할 수 있는 내실있는 방안들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방재 관련 예산도 지금보다 최소 4배 이상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예산권을 쥔 국회의원들이 문화재 보호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 더욱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정책위원은 "새로 만들어졌다는 방재매뉴얼을 뜯어보면 기존의 큰 틀에 조치요령 등을 대입해 놓은 정도로, 상황발생 때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 의문"이라며 "형식적 대책으로는 결국 숭례문 화재 같은 일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그는 "사찰문화재, 한옥, 향교, 서원 등은 화재 등에 무방비 상태에 있는 실정"이라며 "목조문화재에 사람이 살도록 하면서 보존케 하는 등 더욱 고급화된 문화재 관리방식 도입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