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착지인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대통령과 회담을 마치고 가진 기자회견장에서의 일입니다.
넉넉지 않은 기자석에 빽빽이 자리잡은 아랍 기자들은 반 총장을 향해(당시만 해도 폭격이 진행중이던) 가자지구에 들어갈 의사가 있느냐, 가자에 들어 가기 위해 이스라엘에 공격 중단을 요구한 적이 있느냐, 나아가 유엔 총장이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인지 요구인지 구분이 안되는 말을 거친 어조로 쏟아냈습니다.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가자에 들어갈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당시 여러 상황상 저간의 사정을 속시원히 밝힐 수 없었던 반 총장은 그저 완곡한 답변이나 "No Comment"로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자 일부 기자들은 발언권도 얻지 않은 채 큰 소리로 질문을 계속 이어가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욕설인지, 탄식인지 모를 혼잣말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기자이기 이전에 고통을 당하는 팔레스타인들과 같은 아랍인으로서의 분노와 안타까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만국공통인 기자회견장의 불문률과 인간적인 예의를 도외시하는 듯한 이들의 태도를 지켜보는 제 입장은 내내 불편했습니다.
아마도 난처한 상황에 처한 반 총장이 같은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당혹감과 착잡함이 더 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랍 기자들의 이런 다소 공세적인 태도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다른 방문국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 순방 동행기자단과의 조찬 간담회. 빡빡한 일정 탓에 반 총장은 30분 남짓의 아침식사 시간도 기자단과의 문답에 할애했다.
▲ 기내에서도 틈틈히 기자들과 만나 각국 정상들과의 휴전 외교 뒷얘기와 순방 성과에 대해 브리핑.
기자들 뿐 아니라 레바논 의회에서는 축사에 나선 의회 지도자도 반총장 면전에서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유엔의 역할에 대해 강도높은 불만을 서슴없이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 레바논 의회에서의 연설.
레바논 의회에서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일은 언론플레이에 능한 정치인들은 어디에나 있다는 점을 확인한 것입니다.
우리 국회에서도 간간히 유치하지만 언론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벤트로 한 건 올리는 의원들이 더러 있듯이 레바논 국회에서는 한 의원이 반 총장 연설 때 아기 인형을 높이 치켜드는 퍼포먼스를 펼쳐 카메라 플래쉬 세례를 받았습니다.
나름 가자지구에서 희생되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를 상기시켜 보려는 의도였지만 하필 행위 당사자가 요란한 의상에 머리와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흐르는 '마리오' 스타일이라 그 진정성 보다는 쇼맨십이 두드러져 보이는 듯 했습니다.
이번 전쟁을 이끌며 연일 강경발언을 토해내 아랍 사회에서는 '마녀' 이미지가 굳어진 리브니 이스라엘 외무장관의 경우에도 반 총장과의 합동 기자회견에서 휴전을 호소하는 반 총장을 옆에 두고 "누구도 우리에게 공격 중단을 요구할 수 없다. 공격 지속 여부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이 결정한다"는 방자한 멘트를 날려 반 총장을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사회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외교관으로 살아와 점잖고 세련된 언사에 익숙한 반 총장으로서는 이렇게 거친 화법들이 귀에 거슬릴 법도 하건만 언제 어느 자리에서든 평정심을 잃지 않고 준비된 메시지를 전해 고수의 풍모를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