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주가가 사상 최고 수준으로 급락합니다. 거품이 잔뜩 쌓였던 경제가 무너지면서 내부 문제점들이 하나 둘씩 나타납니다. 견실하지 못한 기업들은 하나 둘씩 무너지고 실업자들은 속출하고 돈 때문에 자살하는 갑부들이 뉴스에 연일 등장합니다. 정치인들은 "국내 회사는 물건을 못팔아 망하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있는데 왜 외국 상품들은 국내에서 잘 팔리느냐, 가격을 터무니없게 낮게 책정해서 그런 것 아니냐" 며 관세를 대폭 올립니다. 그러자 상대국도 보복 관세를 대폭 올립니다. 이들 나라는 국내 산업과 일자리를 살렸을까요?
지금 세계 경제 상황과 거의 비슷한 이 상황은 바로 대공황 초기였던 1930년대 모습입니다. 미국 상원의원인 스무트와 홀리 의원은 이런 이유로 대표적인 보호무역 법인 '스무트-홀리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미국과 세계 경제에 대공황을 더 오래, 더 심하게 가져오게 만들었죠. 미국은 헌법 제 1조에 '통상'에 관한 권한은 의회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을 정도로 의회가 무역을 좌지우지하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스무트-홀리법'의 나쁜 학습효과 덕에 이후 행정부에 관세인하 협상권을 넘겨주고 의회는 협상안을 승인하는 방식으로 바꾸게 됩니다.
미국과 유럽 등 당시 세계 주요 경제대국들은 대공황과 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런 악몽을 다시 겪지 말자며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체결해 제조업 분야에 한해서 관세인하 협상을 시작했습니다.'세계무역기구'(ITO)까지 만들려고 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실패한 뒤 결국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에 합의해 1995년 기구를 출범시켰습니다.
그런데 힘들게 상자에 가둬뒀던 '극심한 보호무역'이라는 '악마'가 올해 다시 고개를 들 조짐을 곳곳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 제 살길이 바쁜 나라들이 70년이 넘어서 그런지 '악마의 위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지난해 11월 세계 20개국 정상은 'G-20' 회의에서 "앞으로 1년 동안은 새로운 무역장벽을 만들지 말고 DDA 협상의 연내 타결을 위해 노력하자"고 했습니다. 청와대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이를 제안했다며 성과라고 발표하기도 했죠. 하지만 DDA(도하개발어젠다:제조업,농업,서비스업의 무역장벽을 낮추는 협상)는 회의 한 번 못해보고 해를 넘겼고, G-20 회의 직후 러시아와 인도가 각각 자동차와 철강에 대한 관세를 올렸습니다.
가입국은 GATT/WTO 가입당시 약속한 관세 상한선을 낮출 수는 있어도 높일 수는 없지만 지난 20여년 동안 세계 무역의 황금시절을 거치며 대부분 관세를 대폭 낮췄기 때문에 다시 올릴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굳이 관세 인상이 아니더라도 미국,유럽 같은 강대국들은 자기 사정이 급하다며 아예 대놓고 WTO에서 금지한 국내 특정 기업에 대한 차별적인 정부보조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자동차 3사에 대해 구제금융 174억 달러를 지원하고 EU 역시 자동차 산업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EU의 사양산업인 철강산업을 보호하기위해 철강 수입을 규제하고 중국산 제품에 대한 안전성 검사를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거기간 이미 '한국의 자동차 수출'에 관한 보호무역적인-사실은 타당하지 않은- 발언을 했던 오바마 행정부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오바마의 경제자문역할을 하고 있는 로라 타이슨 버클리대 경제학과 교수는 세계 경제학자, 언론, 정부당국자들의 시선이 쏠리는 무대인 이달 '전미경제학회'에서 "앞으로 미국 정부가 일자리 보호를 위해 미국 현지생산 비중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부시 행정부가 맺어온 FTA(파나마,콜롬비아, 한국)는 대부분 안보적이거나 동맹국을 고려한 정치적 이유에서 체결됐고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놀랄 일이 아닙니다. 현재 미국 의회 상,하원을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은 지난해 부시 행정부가 신속처리협상권(TPA: 의회가 협상 내용을 수정하지는 못하고 찬.반 투표만 할 수 있는 권한.한미 FTA에 마지막으로 적용됐으며 지난해 시한이 만료돼 소멸된 권한)을 믿고 미-콜롬비아 FTA를 상정하자 하원에서 낸시 펠로시 의장 주도로 TPA 적용 무효결의안을 채택해 권한을 박탈한 전력이 있습니다. 미-콜롬비아 FTA는 이제 의회가 자구 하나하나를 모두 수정 심의할 수 있게 돼 사실상 의회통과가 물건너 간 셈이 됐죠.
오바마 당선인도 선거기간 발언 못지않게 투표 경력에서도 '보호무역주의' 소신을 보여왔습니다. 미국에는 그동안 상원의원 버드가 발의해 만든 '버드수정법' 이라는 '보호무역성 법'이 있었는데요. 이 법은 만약 미국이 자국 기업인 마이크론의 요청에 따라 한국의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반도체에 대해 반덤핑 또는 상계관세를 적용해 돈을 받으면 이 돈을 마이크론에게 주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반덤핑, 상계관세만 해도 강대국이 약소국 기업에게 마음대로 적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제소기업에게 법률비용이라는 부담을 주고 보복관세로 얻은 돈을 국내 기업에게 주겠다니 기가막힌 법이죠. 이 법 때문에 우리 기업들은 피해를 많이 봤고 결국 WTO에 제소해 몇 년 전 폐지됐는데 오바마가 상원의원 시절 이 법의 폐지에 반대한 경력이 있습니다.
오바마와 민주당 정부가 경제위기 속에 자국 내 일자리에 위협을 줄 수 있는 '한미 FTA' 비준이나 'DDA' 협상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고 보는 통상전문가들의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은행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2009년 세계무역량이 아래 그림에서처럼 1982년 이래 처음으로 감소하고 신흥국가로의 자금 유입이 2007년 1조 달러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동안 중국, 인도, 한국, 대만 등이 과잉생산한 물건들을 미국에서 빚을 내 과소비를 하면서 사줬는데 미국 소비자들이 지갑을 못 열고 중국 소비자들이 이 공백을 메워줄 수 없으니 세계 무역이 '수요자 부족공백'을 겪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미국이나 중국 모두 '우리 코가 석자'인데 왜 남의 나라까지 신경써 줘야하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해 지고 이는 세계 무역의 감소로 이어지게 될텐데요. 그 강도에 따라서는 세계은행의 전망치보다 세계무역이 더 위축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 당장 '보호무역이라는 악마'가 창궐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변수인거죠. 하지만 점차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에서 실업자들이 늘어나고 파산하는 기업들이 늘면 정치인들은 희생양을 찾게 될 것이고 그 타겟은 상대적인 고성장을 하게 될 '중국'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우리도 중국과 함께 희생양이 될 것이란 걱정도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반덤핑 제소(수출가격을 국내가격보다 터무니 없게 낮게 책정했다며 제소)와 상계관세 제소(정부 또는 정부 영향력에 있는 기관,은행이 WTO에서 금지한 보조금을 특정 수출기업에게 지원했다며 제소)를 당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기때문이죠. 보호무역 분위기가 창궐하면 그만큼 여러 나라의 표적이 되기 쉽고 우리 경제에는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보호무역 조짐이 꿈틀거리는 지금 미리 최악의 상황까지를 가정해 대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동안 4차례 글을 통해 우리 경제에 영향을 줄 변수들을 다뤘지만 당장 올해 폭발할 위험요소들은 도처에 깔려있습니다.
지난해부터 우리 금융시장을 괴롭혀 온 '디레버리징(빚을 줄여나가기 위해 자산을 파는 현상)' 흐름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고, 부도위험을 사고 팔았지만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았던 CDS(Credit Default Swap)는 세계적으로 60조달러 규모나 되는데 시장 붕괴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문제의 근원인 미 주택시장은 앞으로도 15% 이상 하락할 수 있고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서도 거품붕괴가 본격화 될 수 있습니다. 미국 실업률은 두 자리 수를 육박할 전망인데 오바마 정부의 경기부양책 규모는 부족하다는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의 지적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세계 금융시장의 동시붕괴라는 태풍을 벗어나니 이제 한 숨 돌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쩌면 지금은 잠시 태풍의 눈에 머물고 있는 것이며 우리 앞에는 몇 차례 태풍이 더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