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생각에는 공이 있으면, 빛을 받으면 절반은 어차피 그늘일 수밖에 없는데 다들 밝은 쪽만 얘기를 하니까 이쪽은 왜 얘기를 안 하느냐 이쪽이 보이잖아요. 그래서 이쪽을 얘기한 것뿐인데 그럼 전체를 평형감각으로 봐주면 될텐데 이쪽을 얘기하는 것이 마치 무슨 사회를 선동하려고 한다거나 그런 것으로 오해를 받았던 것 같아요"
김민기. 대학로에서 오랫동안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공연한 극단 학전 김민기 대표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다들 밝은 쪽만 얘기할 때 그는 그 반대쪽을 얘기해 왔다. 그의 대표작품 지하철 1호선'도 그의 그런 평소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다. 또 그가 다른 사람들은 잘 하지 않는 어린이극을 꾸준히 무대에 올리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특히 '지하철 1호선'은 뮤지컬로서는 정말 '드물게' 우리 사회의 서민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독일 그립스 극단의 작품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각색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정호승 시인의 시처럼, 우리 사회의 그늘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자 애정의 산물이고, 우측 통행을 하는 평범한 지하철 대신 유일하게 좌측 통행을 하는 지하철 1호선을 선택한 것은 김민기 대표가 추구하는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91년 극단 학전을 설립하면서 김민기 대표는 대학로에 둥지를 틀었다. 1985년 대학로가 문화지구로 선정되면서 극단들이 하나 둘씩 대학로 들어오면서 대학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을 때다. 동숭아트센터 올라가기 직전, 왼쪽 골목길에 자리 잡은 학전 그린은 그에게 결코 낯선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그가 다녔던 옛 서울대학교의 구내 식당이 있던 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구내식당 이름이 '학전'이었기에 그는 극단의 이름을 '학전'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언제가 나는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법해서 학전이라는 이름의 연유를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냥 그래서 지었다'라는 생각보다는 상당히 싱거운 대답만 돌아왔다.
김민기 대표는 그곳에서 70년대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음악극 제작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독일문화원에서 본 'Linie 1'을 무대에 올리기로 작정했다. 그가 평소 생각하던 전통 마당극 형식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민기 대표는 이후 그 독일 뮤지컬을 물고 늘어졌다. 작품 쓰기에 들어가면 아주 예민해진다는 직원들의 얘기로 미뤄볼 때 '물고 늘어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렇게 준비해서 김민기 대표는 1994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드디어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이후 15년 동안 김민기 대표는 '지하철 1호선'을 운행해 왔다.
"당시 여러 작품을 들여다 보았어요. 브로드웨이 작품들은 완전 포장된 상품이라는 점에서 재미가 없었어요. 'Linie 1'은 '뮤지컬 레뷔'라는 서브 타이틀이 붙어 있어요. '레뷔'라는 것이 유럽의 전통적인 마당극 형식이거든요. 온갖 장르의 것들이 그 안에 혼합되어 있었어요. 뮤지컬이란 명침이 원리 '코미디 뮤지컬'에서 나온 말이에요.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이미 가공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면, 레뷔는 하나의 상품으로 포장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여러 장르가 공존하고 있는 형태에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전신이라고 봐야 해요, 오히려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과 공부해 볼만한 여지를 느꼈어요. 70년대 초반에 원초적인 마당극 형식을 실험해봤기 때문에 나에게는 아주 익숙한 작업이었지요. 70년대 했던 공부의 연장선으로 느껴졌죠" <2008년 12월호 '더 뮤지컬' 인터뷰 중에서>
레뷔:
춤과 노래, 시사풍자 등을 엮어 구성한 가벼운 촌극이다. 뮤지컬의 전단계 또는 뮤지컬의 한 종류로 분류되며 뮤지컬과 달리 줄거리가 없다. 하지만 주제가 있다는 점에서 주제가 없는 보드빌과 구별된다.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처음 공연되었고 19세기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 미국과 영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1910년대와 1920년대 많이 공연되었으나 라디오와 텔레비전, 영화 등에 밀려 1940년대 대형 공연은 거의 사라지고 나이트클럽이나 캬바레 등에서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오락성을 강조한 버라이어티 쇼라는 평가를 받는 레뷔는 뮤지컬 레뷔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1990년대부터 뉴욕 오프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많은 작품이 공연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김민기 대표는 대학시절인 1974년 우리나라 마당극의 효시라고 평가 받고 있는 '아구'라는 작품의 대본을 쓰고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올렸다. 이 작업에는 이종구, 채희완, 임진택, 김석만, 이애주 등이 참가했다.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을 소재로 당시의 한일관계를 풍자한 이 공연은 당시 입장료가 200원이었는데 암표가 무려 3000원씩에 거래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또 1981년 김민기 대표가 서울을 떠나 전라북도 김제에서 농사를 짓던 시절, 그는 김제 전주지방의 젊은 연극패들과 함께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를 창작해 워크샵 형태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대학시절 우연히 국악에 눈을 뜨게 되고 마당극 형식에 관심을 가지면서 맺은 인연을 그렇게 오래된 것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마당극이라는 형식에 애착을 갖고 있었고 그랬던 그에게 'Linie1'을 보고서 그 열린 형식, 즉 우리네 마당극을 본 것이었다. 김민기 대표는 그의 방법으로 독일 뮤지컬 'Linie 1'의 형식과 내용을 한국적으로 해체했다. 그리고 그 해체의 결과는 그야말로 청출어람이었다. 원작보다 더 오래 공연하면서 무려 4000천회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지난 2000년 1000회 공연을 돌파할 때 독일의 원작자 폴커 루드비히는 '원작을 뛰어넘는 작품'이라며 앞으로 저작권료를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김민기 표 '지하철1호선'을 인정한 것이다.
김민기 대표는 스스로 '지하철 1호선'이 90년대의 풍속화로 남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1998년 11월이라는 상황에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고정해 왔다. 물론 1994년 초연 버전에서는 진짜 운동권 학생이 나중에는 가짜 운동권 학생으로 설정이 변하고, 시대상에 맞는 약간의 대사를 바뀌긴 했지만 '지하철 1호선'은 1990년대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을 낱낱이 얘기하고 있다.
사실 김민기 대표는 서울대 미대를 나온 미술학도 출신이다. 그러나 그가 대중에 더 널리 알려진 것은 붓을 잡은 화가가 아니라 기타를 든 가수다. 양희은씨가 부른 '아침이슬'도, '작은 연못'도, '상록수'도, '늙은 군인의 노래'도, '친구'도 모두 그가 만든 노래들이다. 그의 음악과의 인연은 학창시절 누나가 사준 기타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누나가 사준 클래식 기타 하나가 그의 '팔자'를 크게 바꿔놓은 것이다. 독학으로 배운 그의 기타 실력은 당시 교내를 평정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미술이 더 좋아 미대에 갔다. 하지만 김민기 대표 스스로가 인정하듯 '팔자'라는 것이 그를 음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듯 하다.
"내가 고등학교 때 클래식 기타를 쳤는데 대학생이 되자, 역시 고등학교 때 보컬 그룹을 하던 한 친구가 나에게 왔다. 보컬 그룹을 했다는 건 클래식 기타는 칠 줄 모르고 리듬 기타만 칠 수 있다는 거다. 그 친구가 딴따라하고 싶으니까 날 찾아와서 트윈 폴리오처럼 자기는 리듬 기타를 칠 테니 나보고 클래식 기타를 좀 쳐줬으면 했다. 그래서 '도비두'라는 걸 하게 됐다. 그리고 좀 있다, 친구 하나가 양희은과 함께 찾아왔다. 노래를 불러 돈을 좀 벌어야 되는데 도와달라는 거였다. 그래서 양희은의 기타 반주를 시작하게 됐는데 하다보니까 그 때 양희은이 부른 노래가 대부분 미국 스탠더드 팝이었다. 만날 영어 노래만 하는 거지. 그러다보니 '이 정도는 나도 만들겠다'하는 건방진 생각이 들어서(웃음) 양희은을 위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라디오 프로그램 PD가 찾아와 같이 좀 해보자고 해서 얼떨결에 판을 내고 싱어송라이터라는 게 됐다. 그때만 해도 가수가 되겠다,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다" <2006년 필름 2.0과의 인터뷰 중에서>
대학시절 김민기 대표는 미대생이었지만 음악과 더 가깝게 지냈던 것 같다. 절친한 선후배 사이인 가수 조영남씨가 어느 신문기사에서 밝힌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내가(조영남) 미술로 가는 길을 터 준 것도 사실은 김민기였다. 군대 시절 그를 만나러 동숭동 서울대 미대 캠퍼스로 가서 널려 있는 미대생 실습작을 보며 '야 내가 발가락으로 그려도 이것보다 잘 그리겠다' 했을 때 그 자가 '우핫핫핫하' 웃으며 '형이 그려야 해, 우리보다 잘 그릴거야'하는 바람에 그때부터 캔버스와 유화물감을 잔뜩 사 가지고 부대에 들어가 짬만 나면 그림을 그려 담았다."
<중략>
"내가 주말 휴가를 나오면 둘이 함께 미아리 근처 내 여자친구 집으로 몰려가 나는 마루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김민기는 기타만 둥둥 쳐 댔다. 온종일 음대생은 그림을 그리고 미대생은 기타를 쳐 댔다." <동아일보 2007년 3월 10일자>
이후 조영남 씨가 군에서 제대한 뒤 처음 미술전시회를 열게 해 준 것도 김민기 대표였고, 안국동 골목에 있던 '한국화라'을 빌려 아마추어 화가 '조영남 전시회'를 열어 준 것도 김민기 대표 덕분이라고 한다.
음악인으로서 팔자, 어쩌면 그는 스스로 그 '팔자'를 만들어 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술보다는 음악이 그리고 그 노래를 바탕으로 마당극, 노래극이라는 '극'형식이 그가 이 사회에 말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대중들과 소통하기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김민기 대표는 언제나 '배우는 것'이고 나름의 '실험'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의 문제이지 결코 내용의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항상 이 사회가 무시하고 넘어가려는 문제, 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그는 그의 방식으로 외친다. 교육의 잘못으로 장애우들에 대한 잘못된 시선을 얘기하고자 어린이극 '슈퍼맨처럼!'을 공연하고, 너무나 바쁜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풍자하고 싶어서 노래극 '그림자 소동'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민기 대표에게 뭔가 거창한 것을 기대하고 그런 질문을 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담담할 뿐이다.
Q: 선생님이나 학전이 추구하는 것을 보면 빠르게 변화되고 자본이 중심이 되는 삶에
제동을 걸고 싶은 욕망이 느껴집니다
A: "무슨 힘으로 그러겠어요. 그렇게 못 쫓아가니까 그냥 학전 식으로 가는 거지.
자기가 원해서 사는 것을 비판을 하면 뭐하겠어요. 단지 나는 내 식으로 살 뿐이지" <더 뮤지컬 2008년 12월호 인터뷰 중에서>
김민기 대표는 4000회를 끝으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끝내고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21세기 버전을 새로 준비하고 있다. 세상은 바뀌어 가지만 사람들이 변해가고 있지만 변하지 않는 않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 그 둥근 세상 안에는 밝은 곳과 그늘이 있다'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김민기 대표는 그 그늘을 또 한번 다른 방식으로 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민기
1951년 전북 익산 출생
1969년 경기고 졸업, 서울대 미대 회화과 입학
1970년 '아침 이슬' 작곡
1974년 최초의 마당극으로 평가되는 소리굿 '아구' 국립극장 공연
1983년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연출
1987년 어린이 뮤지컬 '아빠 얼굴 예쁘네요' 대본, 작곡
1991년 소극장 학전 개관
1993년 김민기 전집 출반,
1994년 '지하철 1호선' 초연
*김민기 대표에 관한 이야기는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의 김민기 연보'를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