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백화점에서 꽤 잘 나가는 브랜드로 손꼽히던 여성의류 브랜드 A업체의 김영수(가명) 사장은 요즘 매일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창고에 쌓여가는 재고 물량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쉰다.
F/W(가을·겨울) 시즌에 맞춰 50여개 아이템을 생산했지만 아직까지 매출이 일어날 기미가 통 보이지 않는다.
통상 8월말부터 시작해 9월이면 가을 상품이 빠져줘야 하는데 올해에는 10월초까지 날씨가 추워질 기미를 안 보이더니 백화점 입점 매장에서도 가을 상품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연초부터 경기가 안 좋아지고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더니 9월부터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환율이 치솟고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달 들어서는 급기야 '제2의 환란', '제2의 IMF'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가을 재고를 털어내야 할 백화점 정기세일 기간에도 매출이 작년의 반에도 못 미쳤다. 사람들의 지갑에 자물쇠가 채워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옷이 팔리지가 않고 있다.
김 사장은 지난해 30억 원 가량의 매출을 올리면서 올해 초 사업계획을 짤 때 가을.겨울 시즌 물량으로 20억 원 정도를 비용으로 잡았다. 생산원가에 매장 운영비와 인건비 등을 합친 액수다.
의류는 통상 재고가 발생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생산량의 60% 정도는 매출이 발생해 판매대금을 손에 쥐어야 사업이 돌아간다. 판매대금 외에는 자금 유동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를 확보하지 못하면 다음 시즌 제품 생산과 사업 운영이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올해의 경우는 12억 원 정도는 매출이 나와야 원가와 유통마진을 뺀 뒤 다시 생산자금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올 가을부터 매출액이 생산액의 40%에도 못 미치면서 자금 흐름이 완전히 막혀버렸다. 협력업체에 지불할 어음의 만기일이 다가올 때마다 매번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심정이다. 이달에는 현금 보유액이 거의 바닥이 난 상태라서 더욱 그렇다.
자금 마련을 위해 며칠 전 은행을 찾아갔지만, 은행 대출 담당자의 반응은 싸늘했다.
추석 전까지만 해도 흔쾌히 대출 승인을 내줬던 그 담당자는 이번에는 팍팍하게 굴었다. 담보가 부실하다는 거였다. 의류업체이다 보니 재고 말고는 고정 자산이 없는 형편이어서 김 사장은 자신의 집을 담보로 내세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담당 직원은 회사의 재무구조가 점점 악화되고 있어 지불 능력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대출이 어렵다고 했다.
김 사장은 창고에 쌓인 재고를 바라보면서 단 1억 원이라도 현금화할 수 있다면 '눈물의 땡처리'를 해서라도 물량을 빨리 소진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날씨가 좀 더 추워지면 겨울 매출이 오르기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의 자금 사정으로 보면 더 기다릴 여유가 없어보인다. 어떻게 해서든 당장 손에 몇 푼이라도 쥐는 것이 중요한 상황이다.
최근 동종 업계의 몇몇 업체들도 어음을 막지 못해 줄줄이 부도가 났다. 다른 몇 개 업체들은 몇 달째 임금을 체불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들었다.
김 사장 역시 최악의 상황이지만 차마 한 식구같은 직원들을 상대로 구조조정을 할 수는 없어 최근 인건비를 한시적으로 변동비용으로 돌려 지급 기일을 좀더 늦추자는 제안을 했다. 상여금과 각종 수당을 못 준 지가 이미 2개월이 넘어 직원들 볼 낯이 없었지만, 회사가 무너지는 상황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협력업체인 임가공업체도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터라 임가공비용이 올랐지만 비용을 동결해준 상황이다. 고통분담 차원에서 대금 결제일도 조금씩 늦추고 있다. 김 사장의 A업체가 부도를 맞게 되면 협력업체도 연쇄부도가 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A업체는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다. 김 사장은 며칠 전 평소 업계에서 친하게 지내던 B업체 사장으로부터 눈물의 하소연을 들었다.
영캐주얼 의류를 주로 생산하는 B업체는 환율 급등으로 더욱 치명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고 했다.
저가 제품의 수지를 맞추기 위해 몇 해 전부터 중국 업체에 소싱을 해 제품을 들여오고 있는데, 작년부터 인건비와 물가가 상승하고 위안화가 작년에 비해 70% 이상 뛰면서 최근에는 생산비가 작년의 2배 수준으로 오른 상황이다. 중국도 이제 수지가 맞지 않지만 그렇다고 달리 생산할 만한 지역도 없다. 환율이 오르다 보니 동남아 시장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가격을 올리자니 경쟁력이 없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최근 매출은 오히려 더 떨어지고 있으니 영업 손실이 걷잡을 수 없다고 했다.
환율 피해로 따지면 이보단 좀 덜하지만 김 사장도 불안한 상황이다.
그간 상대적으로 고급 브랜드 전략을 택해 이탈리아에서 원단을 수입해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데 시즌에 2개월 정도 앞서 제품을 만들기 때문에 이번 가을.겨울 제품까지는 이미 대금이 지급돼 아직은 괜찮다. 그렇지만 이미 발주한 내년 봄.여름 상품용 원단에 대한 대금을 결제해야 할 시점이 오면 얼마나 내야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원단 1야드에 평균 2만 원대이던 것을 최근 환율로 따지면 3만 원까지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다. 생산비가 1.5배 더 커지게 될 판인데, 소비가 이렇게 위축된 상황에서 이를 반영해 가격을 올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루빨리 환율이 진정되기만 기도할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내수 경기가 살아나는 것이다.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소비를 해줘야 내수가 살아나고 관련 업체들도 살아날 수 있다고 김 사장은 역설한다.
국내에 A업체와 같이 소규모 브랜드를 운영하는 군소업체들만 200여개에 달한다. 1개 업체당 내부 직원과 매장 영업직원까지 합치면 평균 100여명은 넘는다고 하면 최소 2만여명이 비슷한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협력업체까지 따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벼랑 끝에 내몰려 있는 상황이라고 하니 김 사장의 말은 더욱 절박하게 들린다.
김 사장은 28일 "현재 의류업계는 정말 희망이 안 보이는 상황"이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위축된 소비심리가 풀려 매출이 조금이라도 살아나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이어 "그런데 자꾸 어렵다, 어렵다고 하니까 돈이 있는 사람들도 심리적으로 더 위축되고 있어 큰일이다"라며 "함께 살려면 내수가 살아나야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국민들이 소비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언론에서도 너무 앞장서서 경제 전망이 어둡다고만 하지 말고 좀더 긍정적인 전망을 얘기해서 사람들의 소비 심리를 좀 풀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