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27일 은행채를 환매조건부채권(RP) 방식으로 사들이기로 한 것은 채권시장에서의 원활한 자금 수급을 통해 시중 금리를 낮추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9월 미국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은행채 발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은행채 금리 상승→양도성 예금증서(CD) 금리 상승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중소기업대출 금리 상승 →이자부담 가중 등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은행들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한다는 우려와 비판에도 한은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은행권 자금난의 숨통을 터주는 동시에 이자 부담에 허덕이는 가계와 중소기업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 은행 유동성 위기 해소 고육책
은행채는 예금과 함께 은행들의 주요 자금조달 수단 중 하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은행들은 예금이 증시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머니무브' 현상이 발생하자 대출 재원을 마련하려고 앞다퉈 은행채를 찍어냈다. 그 결과 올해 연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은행채는 25조 5천억 원에 이른다.
그러나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투자자들의 심리가 꽁꽁 얼어붙으면서 은행채 차환 발행이 이뤄지지 않았다. 글로벌 신용경색으로 은행채의 주요 매수처였던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들이 자금난을 겪자 은행채 매입은커녕 오히려 들고 있던 채권마저 내다 팔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은행에 대한 신용위험이 커지고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나타나면서 아무리 싼 값(높은 금리)에 내놓아도 은행채가 팔리지 않자 은행채 금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은행들의 사정이지만 문제는 대출 금리와 함께 저축은행, 증권사 등 2금융권의 자금난으로 불똥이 튀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채 금리가 오르면서 3개월짜리 CD 금리도 은행채 금리와 격차를 좁히려고 덩달아 뜀박질했다.. CD도 은행에서 발행하기 때문에 은행채와 비슷한 금리 수준을 유지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CD금리는 지난 24일 연 6.18%로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린 지난 9일부터 0.22%포인트나 올랐다.
이에 따라 CD 금리와 연동한 시중 은행들의 주택담보대출와 가계신용 대출, 중소기업대출 금리도 줄줄이 상승하고 있다.
변동형 주택담보대출의 최고 금리는 8%대 중반에 이른다. 8월 말 현재 은행권의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232조9천억 원으로, 이 중 95% 가량은 변동 금리형이어서 CD 금리 상승분을 고스란히 반영할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경기 둔화와 부동산 시장 침체로 가계 살림살이가 팍팍한 가운데 대출 금리마저 올라가면 연체율이 늘어나는 등 부실화할 가능성이 크고 이는 은행의 수익성과 건전성 악화라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은행들이 채권 발행 대신 7%대 고금리로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면서 저축은행, 자산운용사 등이 연쇄적으로 자금난에 처했다. 한은의 은행채 매입 결정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 은행채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매입하나
한은은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일정 가격으로 되사는 방식인 환매조건부채권(RP) 방식으로 은행채를 매입하기로 했다. 이는 금융권에 일시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효과가 있다.
현재 한은의 RP대상 증권에는 국채, 정부가 원리금 상환을 보증한 증권, 통화안정증권에 한정돼 있는데 관련 규정을 고쳐 은행채를 포함하기로 한 것이다.
한은이 RP 방식으로 공급할 유동성은 5조∼10조 원 가량으로, 오는 11월 7일부터 앞으로 1년간 한시적으로 시장 상황에 따라 분할 매입할 계획이다.
한은이 RP매입 거래 공모를 내면 14개 은행과 5개 외국은행 국내 지점, 증권사 1곳, 한국증권금융 등 21개 공개시장 조작 대상 기관들이 경쟁 입찰에 참여해 낙찰받으면 은행채를 담보로 유동성을 공급받을 수 있다. 다른 증권사나 자산운용사 등은 공개시장조작 참여 대상과 다시 RP거래를 하는 방식으로 돈을 빌릴 수 있다.
기존에는 증권사 등 기관투자가들이 일시적으로 자금을 마련하려면 보유 은행채를 시장에 내다 팔아야 했지만 한은의 RP거래로 대체하면 되기 때문에 은행채 매도를 억제하는 효과가 생긴다.
아울러 기관투자가들이 은행채를 담보로 조달한 자금으로 다시 은행채를 추가 사들일 수도 있게 된다.
한은 관계자는 "은행채의 쓸모가 많아지면서 은행채 가격이 좋아지고 금리도 낮아지는 효과가 생긴다"며 "은행을 지원하기보다는 시장 참가자들에게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하려는 조치"라고 설명했다.
한은은 은행채 이외에 한국토지공사, 대한주택공사, 중소기업진흥공단 채권과 주택금융공사가 발행한 주택담보대출채권 등도 RP 대상에 넣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부동산 또는 중소기업 등에도 자금이 원활히 도는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한은은 기대했다.
시중은행들도 한은의 이번 조치를 반기는 분위기다.
국민은행 자금 담당자는 "매입 액수가 5조~10조 원이면 상당히 큰 규모"라며 "은행채가 국고채 등과 함께 안전자산으로 분류돼 투자자나 자산운용사들의 불안 심리를 안정시킬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 관계자도 "은행들의 자금 조달 금리를 낮춰서 전체적으로 금리 인하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이번 한은의 결정으로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은행채뿐 아니라 회사채나 기업어음(CP) 등 다른 채권들의 자금 수요도 부족한 상황이어서 매입 요구가 봇물처럼 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성태 한은 총재는 "은행채를 풀어주면 이것이 계기가 돼 전체 금융시장이 선순환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런 우려를 일축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