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검증 문제를 놓고 미국내 기류가 복잡하게 흐르는 양상이다.
지난 1∼3일 미국측 6자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평양에서 북한과 협상을 벌여 이른바 '순차적 분리검증방안'에 합의하고 귀환했지만 미국 수뇌부의 결정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 이어 조지 부시 대통령이 10일(미국 현지시간) 협상안을 승인하고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조치를 발효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실화되지 못했다.
오히려 미국의 폭스뉴스는 미 행정부 관리의 말을 인용, "라이스 국무장관과 힐 차관보가 수요일(미국시간 8일) 협상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이를 거부했다"면서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는 당분간 미뤄질 가능성이 커졌다고 전했다.
미국 정부가 선뜻 평양 합의안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힐 차관보가 주도한 협상내용이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에서 이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관련국 고위당국자들이 전하는 내용을 보면 북.미가 평양에서 의견접근을 본 검증방안은 `정식 신고서에 담긴 영변 핵시설을 먼저 검증한 뒤 북.미 간 비공개의사록에 담은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및 핵확산 문제, 그리고 과거 플루토늄 추출내역 파악에 필수적인 미신고 시설 등은 추후 검증한다'는 이른바 `순차적 분리검증'으로 보인다.
유명환 외교장관은 10일 브리핑에서 현안인 미신고시설에 대한 검증과 관련, 북한과의 합의를 거쳐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상대국의 동의없이 사찰할 권한을 갖는 이른바 국제적기준에 의한 방식이 아니라 북한의 반대와 6자회담의 운영 등을 감안해 새로운 기준을 적용하게 될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에 따라 UEP 의심시설은 물론 과거 플루토늄 추출 내역 검증에 필수적인 고준위폐기물 저장소 등 신고서에 담기지 않은 시설에 대한 검증은 북한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해질 수 있다.
이 문제는 그동안 미국내 강경파들이 반드시 검증해야 한다고 강조해온 대목이다. 따라서 협상파인 힐 차관보가 `무리한 양보'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부시 행정부내 고위직에 포진한 이른바 '비확산 세력'들은 2차 핵위기 발발 원인인 'HEU(고농축우라늄) 검증'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10월 이른바 'HEU 파동'을 일으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세력들에게 현재의 협상안이 그대로 관철될 경우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수 있다. 차기 미 행정부가 들어선 후 이라크 전쟁의 책임문제와 함께 북핵 사태의 원인을 추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도 반대기류가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인 납치문제가 풀리거나 뚜렷한 진전이 있기 전까지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에 반대해온 일본 정부는 현재 부시 행정부를 상대로 신중한 결정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도 미국 정부의 현실적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입장 속에서도 '낮은 수준의 합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듯 숀 매코맥 국무부 대변인은 10일 정례브리핑에서 테러지원국 삭제와 관련,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 하루 전이나, 일주일 전이나, 한 달 전과 똑같은 위치에 있다"며 "아직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나아가 "6자회담 당사국들이 모두 합의할 수 있는 검증의정서와 검증체계를 확보할 수 있는 지점에 우리가 도달했는지 파악해 봐야 한다"면서 "북한이 의무사항을 충족하면 우리도 의무사항을 이행할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구체적인 시한을 설정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특히 라이스 장관이 유명환 장관, 일본의 나카소네 히로부미 외상, 중국의 양제츠 외교부장과 잇따라 전화통화를 갖고 북한 문제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매코맥 대변인은 전했다.
데이너 페리노 백악관 대변인도 정례브리핑에서 "우리는 검증의정서 문제를 놓고 6자회담 파트너들과 계속 협의중이며 오늘중 이 문제와 관련해 더 이상 나올 것은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북한이다. 미국이 시간을 끌고 있는 가운데 북한은 위기감을 고조시킬 미사일 발사나 추가적인 핵실험 징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이 '시한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벼랑 끝 전술로 보이는 북한의 위협성 행동들은 계속되고 있다.
장고를 거듭하는 부시 대통령, 그리고 힘겨루기를 하는 강경.온건파, 자국의 입장을 강조하는 관련국들, 으름장을 놓는 북한이 얽혀 북핵 외교가의 기류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