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것'
국정감사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국정감사는 통상 '야당 잔치'라고 합니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고 추궁함으로써 현 정권의 국정운영의 부실함이나 부적절함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진행 중인 18대 국회 첫 국감은 반대로 '여당의 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지 7개월여 밖에 되지 않은 만큼 야당으로부터 공격받을 소지가 적기 때문이거니와 오히려 여당이 지난 참여정부 5년의 문제점을 부각시킴으로써 현 야당에게 책임을 넘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독 올해 국정감사와 관련해 여당 의원들의 국감 자료가 많이 나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번 국감에서는 예년에서 볼 수 없는 광경들도 목격됩니다. 과거의 전례를 보면, 국감에서 여야가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다 보면 서로 목소리가 격해지고 욕설이 섞여 나오다가 급기야 멱살잡이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국감장에 마련된 플라스틱 음료수 병을 들어 던지거나 동료의원들의 만류를 뚫고 발길질을 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광경입니다. 그런데, 이번 국감에서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다행스럽게도 이런 광경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 6일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서는 이런 광경이 재현되는 듯 했습니다. YTN 노조의 대규모 징계사태와 관련해 야당 의원들이 의사진행 발언을 이어가던 중 이를 제지하는 고흥길 위원장에게 항의하기 위해 위원장석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기자들을 순간 긴장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위원장이 야당 의원들에게 포위당한 채 항의를 받고 있는데, 여당의 나경원 간사를 제외하고 여당 의원들 전원이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던 겁니다. 예년 같았으면, 여당 의원들이 우르르 나가서 위원장(고흥길 위원장은 여당 의원임)을 보호한답시고 야당 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그러다가 결국엔 회의장이 아수라장이 됐을 터인데, 이번에는 그런 일이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여당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야당의 전술에 말려들지 않는 현명한 대처였다"는 평가도 나왔고, 반면에 "의원들이 자기 보신만 염두에 두다 보니 기질이 약해졌다"는 평도 나왔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 여당의 초선 의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싸움질하는 장면이 TV에 나가면 다음날 바로 지역구에서 욕 먹어요. 그러니 누가 앞장서서 그런 일을 하려 들겠어요." 분명 달라진 모습 중 하나입니다.
'달라지지 않은 것'
그러나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정준형 반장이 ☞ '악악대면 악악거린다'의 제하의 글에서 밝혔듯이, 몸싸움이나 욕설은 줄었지만, 상대를 자극하는 날카로운 입씨름은 여전해 보입니다. 어제(8일) 서울시에 대한 국감에서는 민주당 김유정 의원이 지난 총선 때 여당의 일부 의원들의 '뉴타운 공약'을 오세훈 시장이 방조한 게 아니냐고 따지는 과정에서 한나라당 의원들과 오 시장이 불륜 관계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여야가 설전을 벌였고 회의가 한때 파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국감에서도 이 문제로 초반부터 여야 간에 기 싸움이 뜨거웠고요. 몸싸움까지는 가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말의 자극성은 강해지는 느낌입니다.
또 달라지지 않은 게 있습니다. 피감 기관장들의 꼿꼿한 자세입니다. 16대 국회 때까지만 해도 피감 기관장은 무조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는 태도였습니다. 뭐라고 해명이라도 할라치면 의원들이 "자세가 불손하다. 어디서 큰 소리냐"고 호통을 쳐댔고 그러면 금세 주눅이 드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죠. 그런데 17대 국회 때 참여정부에 입각한 정치인 장관들이 국감장에서 당당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된 바도 있었지만, 이번 18대 국감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일부 보입니다.
이를테면, 통일외교통상위에 참석한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자유선진당의 박선영 의원이 대북 정책 문제를 따지면서 "이전 정부에 이어 이번 이명박 정부에서도 입각한 김 장관은 영혼을 판 게 아니냐"고 거칠게 몰아붙이자 한참동안 설전을 벌였고 결국 "의원님도 반성하십쇼"하고 정면으로 맞받아 쳤던 겁니다. (결국엔 위원장의 경고를 받고 사과했습니다) 또, 어제(8일) 서울시 국감에서 오세훈 시장은 야당의 뉴타운 공약관련 추궁에 "질문을 하셨으면 답변을 들으셔야죠. (의원님 발언은) 일방적이고 정치적인 주장입니다"라면서 정면으로 맞대응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달라지지 않는 것'들은 '달라진 것'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반감이 강해지면서 국회의원들이 멱살잡이나 욕설을 피하고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자세가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대신 언급의 날카로움이나 강도가 강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야당의 입장에서 보면, 정부 여당을 공격할 주요 수단들이 약화됐다는 얘기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야당 측은 소위 '의사진행 발언'을 정치쟁점화의 수단으로 활용하곤 합니다. 이슈화하고 싶을 경우 야당의원들이 연달이 의사진행 발언을 신청하면 당일 피감기관과 상관없는 이슈를 제기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위원장이나 여당 의원들과 설전이 붙으면서 자연스럽게 쟁점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여당의원들과 몸싸움을 해서 언론으로부터 비판적인 기사나 여야모두 비난받은 양비론적인 기사가 나오게 하느니 의사진행발언을 이용해 적절히 쟁점을 이슈화할 수 있다는 얘기죠.
여하튼 국감의 달라진 것들이나 달라지지 않는 것들은 정준형 반장이 지적했듯 언론의 감시가 낳은 또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비해 정쟁국감보다 정책국감이 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사회적 관심과 유권자의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치판에서 언론이 지켜보는 한 이런 '달라지는 것'과 '달라지지 않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변해갈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편집자주] 10년전 '출동 코끼리 기자' 또 '박병일 기자의 현장출동!' 등에서 맹렬하고 거침없는 시사고발 취재로 이름을 날렸던 박병일 기자는 현재 차장이 되어 정치부 여당팀의 현장팀장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제는 연륜까지 더해진 깊이있는 정치 기사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