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천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법안이 미 하원의 한 차례 부결과 수정을 거쳐 이제 '8천1백억 달러' 규모의 법안이 됐습니다.
앞으로 은행들이 더 망할 수 있다는 걱정때문에 예금자보호 한도를 25만 달러로 높였고, 미 하원에서 부결표를 던졌던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중산층을 위한 감세와 농촌지역 교육비 지원 항목을 추가하면서 지난해 우리나라 실질 경제규모보다 훨씬 많은 돈이 '구제금융' 이라는 이름으로 지원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신뢰 붕괴'로 돈이 전혀 돌지 않고 있는 전 세계 자금 시장은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왜 일까요?
현재 상황을 병에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백신(금융위기 해결책)을 만들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인데 지독한 전염병을 지닌 환자(부실금융기관)들은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내상(모기지 부실 파생상품)을 심하게 입었는데 도대체 환자 숫자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아주 건강하다고 믿었던 사람(패니메, 프레디 맥, AIG, 리만브라더스, 워싱턴 뮤추얼, 와코비아 은행)들도 속속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서로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병원(금융기관)도 문을 열어 환자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환자들은 40도가 훨씬 넘는 고열(금융시장 경색)에 시달리기까지 하며 건강한 사람들의 생명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데 백신이 없으니 일단 길거리에 응급의료센터(TARP Plan)를 세워 해열제(구제금융법)를 투약해 시간을 벌기로 했는데 어느 규모로 세워야 하느냐를 놓고 티격태격 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이제야 세웠습니다. 그런데 해열제가 영 시원치 않습니다.
지금 전 세계 금융시장을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매일 등락을 반복하는 주식시장보다 더 중요한 실물경제를 뒷받침하는 채권, 어음 시장이 전혀 안정을 못 찾고 있습니다. 하수도 공사를 위해 지방채를 발행하려 했던 미국 일부 주 정부는 채권을 사는 사람이 없어 공사를 중단하고 있고, 초우량 은행이라고 평가받는 곳조차 자금 조달을 하려면 엄청난 이자를 줘야하는 실정입니다. 미국 경제의 자존심이라는 'GE' 조차 채권발행이 여의치 않아 120억 달러의 보통주 발행에 나섰는데 얼마나 사갈 지 걱정할 처지가 됐습니다. 그리고 35년만에 처음으로 배당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GE로부터 30억 달러를 주고 주식을 사간 워런 버핏은 "구제금융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나는 신문배달을 해야할 지 모른다"고 할 정도로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다.
물론 아무 대책도 안 내놓는 것보다는 당연히 필요한 행동이지만 구제금융법이라는 해열제가 신통치 않은 이유는 법안의 내용과 현 상황의 시급함 때문입니다.
당초 안보다 주택담보대출자들에 대한 지원과 부실기업 경영진에 대한 보상 견제, 감시체계 확립 등이 가미된 안이기는 하지만 구제금융법은 워낙 급하게 만들어져 구체적인 실행절차가 명확치 않습니다. 우선 부실자산을 금융회사로부터 사들일 때 '가격'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어떤 회사는 살리고 어떤 회사는 망하게 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문제가 자의적으로 결정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미 재무부가 부실자산을 너무 비싸게 사들일 경우 고스란히 납세자 부담이 될 것이고 부실자산을 너무 싸게 살 경우 큰 도움이 안 되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현 위기의 근본 원인인 주택시장 부실과 가계부채 문제에 관한 해결책은 갈 길이 더 먼 실정이죠.
또 헤지펀드는 구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기때문에 헤지펀드의 '펀드 런'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헤지펀드는 일반적으로 분기 별로 환매를 할 수 있어 지금까지는 급격한 '펀드 런'이 없었지만 이제 분기가 끝나면서 '펀드 런'이 시작돼 망하는 회사들도 속출하는 운명이 됐습니다.
실제로 모건스탠리의 헤지펀드 고객 가운데 30%가 '펀드 런'으로 돈을 모두 뺐습니다. 헤지펀드 고객들이 환매를 요청하니 헤지펀드들은 다시 자신들이 투자한 금융회사나 자산을 처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모건스탠리나 골드만 삭스가 투자은행을 포기하고 은행 지주회사를 선택해 중기적으로 FRB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지만 실제로 은행 지점을 열거나 은행을 인수해 예금을 받아 유동성 지원을 받기 전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 전에는 '하루짜리 빚(overnite liabilities)'을 갚는데 총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는데 과연 버텨낼 지가 관건입니다. 이미 미 자동차 빅 3의 회사채 금리는 25%로 IMF 위기 당시 우리 기업들 회사채 금리 수준인 3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금리가 높다는 말은 그 채권을 사려는 사람이 없어서 높은 이자를 붙일 수 밖에 없는 형편이라는 뜻입니다.
미국 만이 아닙니다. 우리 정부가 7% 성장을 공약하면서 모델로 삼았던 아일랜드는 실물경기 침체에 이어 뱅크 런(예금자들이 불안을 느껴 너도나도 돈을 찾으러 은행에 달려가는 현상. 미 대공황 시절 극심하게 나타나 예금자 보호 공사가 생기게 됐음)에 대한 위기감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2년 동안 6개 은행의 예금과 부채를 정부가 모두 보증하기로 했습니다. '세계 금융 허브'인 홍콩과 영국 역시 비슷한 조치를 고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제금융법 통과에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시점에 리보금리는 또 기록을 깨며 뛰어올랐습니다. 금융시장이 얼마나 경색돼 있는 지를 보여주는 TED 스프레드는 두 달 전보다 무려 4배 가까이 벌어졌습니다. 돈 줄이 꽉 막혀 있다는 뜻입니다.
리보금리를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16개 은행사이에 거래되는 금리를 집계하는 '리보금리'를 기준으로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주택대출은 물론 각종 파생상품까지 대부분의 금융상품의 금리를 정하기 때문이죠. 이들 상품 규모가 무려 360조 달러에 이릅니다.
대표적인 비관론자인 뉴욕대 경영대학원 루비니 교수는 구제금융법 통과 이후 나타날 위기로 전 세계 은행들이 줄도산이 예상되는 미국 은행과 금융시장을 믿지 못해 돈을 회수하는 '초대형 뱅크 런'이 이미 조용히 진행되고 있고 점차 가시화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루비니 교수는 이 규모를 무려 1조 달러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미 금융시장 경색화를 가속시키며 전 세계 금융시장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금융위기에 선제적으로 잘 대응하고 있다"는 우리 정부의 자화자찬과는 달리 우리 금융시장도 이런 여파로 이미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봐야합니다. 우량 기업들이 주식시장이나 채권시장을 통해 자금조달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증시를 통한 자금조달 규모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0%나 줄어 외환위기 이후 최저수준에 이르렀고 채권시장에서 회사채 발행규모는 매달 1조 원씩 줄면서 9월에 3조 2천 억에 그쳐 지난해 월 평균의 60% 수준 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기업들이 발행한 채권이라기 보다는 은행이나 카드채가 대부분입니다.
이럴 때 앞서 설명한 조용하게 벌어지고 있는 '초대형 뱅크 런'이 가시화 되는 상황이면 우리 외환보유고로 투자한 미국의 프레디 맥, 페니매 채권을 우리가 원할 때 바로 현금화할 수 있다는 장담이 현실화 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선제적 대응을 잘 한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위기에 쓸 '실탄'을 섣불리 낭비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이제는 우리 기업들은 자금 줄이 막히고, 외환 보유고로 투자한 자산은 곧바로 현금화되지 못해 '유동성 위기'가 올 수도 있는 상황을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가 늘 말하는 괜한 '공포감 조성'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엄혹하고 장기적인 위기를 '괜한 자신감'으로 넘기려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특히 올 초부터 세계 흐름과 달리 환율을 가지고 냉·온탕을 반복해 물가를 뛰게하고 외환 보유고 손실을 가져오는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하게 했고, 하루 앞도 못 내다 본 채 '외평채 10억 달러 발행'을 공언했던 경제팀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 이번 글에서는 구제금융법 이후 미국과 우리 금융시장에 닥칠 수 있는 위기들에 관해 다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구제금융법 이후 미국과 우리 실물경제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관해 다뤄보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