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 입성하기 전부터 이름만 대면 웬만한 사람은 다 알만한 유명인이었던 한 초선의원과 최근 잠시 사담을 나누게 됐다. "국회의원으로 몇 달 지내보시니 어떠시냐?"고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더니 "너무 재미없어요."라는, 뜻밖의 진솔(?)한 답이 돌아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국회의원이 되면 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돼 보니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고 큰 맘 먹고 시도해도 쉽게 되는 일이 별로 없더라는 얘기였다.
수많은 이들이 '도깨비 방망이' 쯤을 배달해 주는 것으로 여기고 동경하는 이른바 '금 배지'의 실체가 의외로 무기력 하더라는 탄식을 듣고 방을 나오면서 몇 달 전 역시 초선인 여당의 다른 의원과 나눴던 짧은 대화가 떠올랐다.
새 정부 출범 직후 청와대 인사파동으로 시끄럽던 무렵이다. 인사 청문회에서 부인이 타고 다니는 수입차 때문에 뭇매를 맞은 끝에 "바로 처분하겠습니다"라며 한껏 머리를 조아린 한 '강부자 장관'이 화제였다. 문제가 됐던 승용차는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정도 재산을 가진 '일반인'들 사이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차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더 높은 도덕성과 윤리의식으로 모범이 되야할 공직자의 길에 들어서겠다고 마음을 먹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던 차였지만, 각료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고개를 떨구며 온 국민 앞에 사죄해야할 애물단지로 변했던 것이다.
인사청문회장을 나와서 시쳇말로 '잘 나가는' 로펌의 변호사 출신으로 기업 임원을 거쳐서 정계에 입문한 초선 의원에게 농담삼아 물었었다. "그정도 재력에 학식, 사회적 지위까지 이미 갖추고 있는 분들이면 '일반인'으로 가진 거 맘껏 누리면서 편안하게 사는 것도 괜찮을텐데, 왜들 굳이 정치를 하려고 하죠?" 교과서적인 정의에 따르자면, '기자'도 정치인 못지않게 사회정의와 국가번영, 공동체를 위한 희생 같은 준엄한 가치를 부르짖어야 하는 직업이다. 그런 직업을 가진 이가 그런 '몰정치적'이고 '탈가치적'이고 '이기적'인 발언을 하는데 놀랐었나 보다.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던 그 의원은 최대한 완곡한 단어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 말도 맞긴 한데... 그래도... 디시전 메이킹을 할 수 있다는 게 참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디시전 메이킹(decision making). 어떤 사안이나 상황에 대해 직접 결정을 내리는 행위. 누군가의 지침을 따르는 대신 직접 결정하고 그 결정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행위. 직접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꿔 나갈 수 있는 힘. 멋진 말이다. 수입차 타는 폼과 여유 정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다른 차원과 스케일을 자랑하는 매력적인 단어인 것 같기도 하다. 단, 금 배지를 다는 순간 그 권한과 능력을 맘껏 얻어서 원 없이 발휘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내가 출입하고 있는 여당만 해도 초선의원이 91명이나 된다. 전체 172명의 절반이 넘는 숫자다. 하나같이 내로라 하는 화려한 경력과 능력을 자랑하는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마도 넉 달 전 '디시전 메이킹'이라는 꿈을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의원회관 한 켠에 짐을 풀었을 것이다. 그런데 넉 달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른 요즘, 의원회관을 돌다보면 화려했던 포부는 온데간데 없이 벌써부터 '무력감'에 빠져서 지루함에 몸을 비틀고 있는 이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임기 시작한 지 석달 가까이 '개원'조차 못 했던 걸 옆에서 지켜보고, "선배님들은 왜 회의때마다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변들만 하시는 겁니까? 국회의원은 원래 '고장난 라디오'입니까?"라는 어느 초선의원의 '절규'를 회의장에서 직접 들은 마당에 개인의 노력 부족 아니냐고, 불평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몰아부치기도 민망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국회의원이라는 자리가 정말 제대로 된 '디시전 메이킹'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로 인정받은 수백 명 선량들이 더이상 심심하고 재미 없어서 몸을 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국회가 좀 더 재미있고 활기차고 생산적인 공간이 됐으면 한다. 넉 달만에 환상이 깨져서 좌절한 초선의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매달 그들의 세비를 꼬박꼬박 내 주고 있는 나를 포함한 모든 국민들을 위해서 말이다.
[편집자주] SBS 보도국 정치부의 홍일점으로 맹활약 중인 김영아 기자는 1995년 공채로 입사했습니다. 스포츠와 사회부 등을 거쳐 현재는 정당 취재팀의 고참이면서도 현장을 놓치지 않는 활발한 취재로 섬세한 시각이 담긴 정치 뉴스를 전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