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행정부와 민주·공화 양당 지도부가 합의한 금융구제안이 부결된 이유는 무엇일까.
29일 미 하원은 7천억 달러 규모의 긴급경제안정화법안(Emergency Economic Stabilization Act of 2008.EESA)을 본회의에 상정, 표결을 실시했지만 찬성 205표, 반대 228로 과반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의회 관계자들은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법안이 간발의 차로 통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워싱턴포스트(WP)의 미국 의회 전문가 벤 퍼싱은 자신의 블로그인 '캐피톨브리핑'을 통해 구제법안이 부결될 수밖에 없었던 5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 홍보 부족 = 이번 법안이 7천억 달러란 천문학적 규모이긴 하지만 이중 일부 혹은 상당 부분은 사들인 부실자산의 매각 및 지분 처분 등 방식으로 납세자들에게 반환될 것이란 사실이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처음부터 이러한 사실을 따로 강조하지 않은 탓에 미국 국민들과 언론매체, 정치인들이 엄청난 비용 규모에 기가 질리는 상황을 초래했다.
또 처음부터 지나치게 적극적이고 패기만만한 태도로 '감독은 필요없다. 우리가 원하는 건 뭐든 내놓으라'는 식의 구제안을 내놔 상당수 의원들에게 불가능한 걸 바라고 있다는 인상을 준 것도 잘못으로 지적됐다.
백악관은 오랫동안 정치적 강경노선을 택해 왔지만 지금은 강경이 아닌 간청(begging)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퍼싱은 꼬집었다.
또 사태의 원흉인 월가(街)를 '구제(bailout)'한다는 부정적 어감의 표현을 사용하도록 내버려 둔 것도 문제로, 부시 대통령이 '구조(rescue)'란 말을 꺼냈을 때는 이미 전세가 기운 상황이었다.
◇ 총선을 앞둔 정치적 상황 = 난전이 예상되는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의원들은 대중의 입맛에 맞는 선택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스테니 호이어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와 존 뵈너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는 모두 의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보다는 난국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신경쓸 수밖에 없다. 차라리 대의를 위한 희생을 내세웠던 게 나은 결과를 내놓았을 것이다.
◇ 구심점 부족 = 부시 대통령이 임기말 레임덕에 접어든 상황에서 대신 구심점 역할을 맡아 법안 통과를 추진한 인물이 없었다.
공화당 대선후보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민주당 후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구제법안을 지지한다면서도 진심으로 통과를 돕지는 않았다. 실제 이들은 자기당 의원들에게 법안 통과를 위한 로비를 촉구하지도 않았다.
양당 지도부는 구제법안에 합의하고 소속 의원들에게 찬성표를 지시했지만, 위협이나 매수 등 법안 통과를 확정시킬 방안을 전혀 강구하지 않아 영향력이 실리지 않았다.
퍼싱은 모두가 책임을 지길 꺼린 상황이 권력공백 상태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 이념적 문제 = 많은 의원들은 단순히 이번 구제안 자체를 싫어했다.
자유시장에 개입하고 강한 규제를 신설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혈세를 동원한다는 내용의 이번 법안은 공화당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의회내 소수파로 국정운영의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점도 공화당 의원들이 구제안 부결을 주도하게 된 원인으로 분석된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부시 행정부와 의회 다수파인 민주당이 책임질 일이라는 것.
민주당 역시 부시 대통령이 이번 법안을 통해 금융위기의 원흉인 월가에 면죄부를 주는 한편 실권을 장악하려 든다고 판단하고 있었을 뿐더러, 압류 위기에 처한 주택보유자들을 돕기 위한 방안도 미흡하다고 봤다.
◇ 민주·공화간 당쟁 = 법안 부결 직후 기자회견에서 공화당 지도부는 민주당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표결 직전 연설이 부결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내비쳤다.
뵈너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는 "하원 석상에서 의장이 당파주의적 연설을 내놓지 않았다면 법안이 통과되었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금융위기의 모든 책임은 부시 행정부에 있다는 펠로시 의장의 발언에 마음을 상한 공화당 의원들이 마지막 순간 마음을 바꿔 반대표를 던졌을 수 있다는 것.
민주당 바니 프랭크 하원 금융위원장은 이를 두고 "누군가 내 마음을 상하게 했기 때문에 난 이 나라에 벌을 줄 생각"이라고 말하는 꼴이라고 비꼬았다.
퍼싱은 마지막으로 주식시장이 초토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의회 구성원 상당수는 여전히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이날 법안 부결의 궁극적 이유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