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서울국제공연예술제를 취재하러 대학로에 있는 아르코 예술극장에 갔다.
한 달 동안 시차를 두고 공연이 열리는지라 개막날 서울에 도착한 외국 공연팀은 칠레팀이 유일, 인터뷰 약속을 해놓고선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강남에 있는 절을 갔다나 왜 안오는지 모르겠다며 홍보 담당자가 애타한다.
마침 두 번 째 인터뷰 약속이 돼있던 김철리 예술감독이 먼저 와 있어 순서를 바꿨다. (김철리 예술감독은 이번 페스티벌에 참가할 작품들을 골랐다.)
인터뷰 끝나고 칠레 연출가 인터뷰한다니까 "나도 공연은 봤는데 연출은 못봤어요. LA에 가있더라고"하면서 우리가 인터뷰할 때 그 연출가를 만나 인사라도 나눌 눈치다.
잠시 극장 로비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칠레 배우들이 들어와서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다. '그래, 젊은 친구들이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 왔으니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모든게 흥분되지'생각하면서 지긋한 나이의 연출가를 상상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웬걸! 반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젊은 외국인 한 사람이 오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스태프인가 했는데 연출가란다. 그냥 보면 젊은 외국인 관광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받은 공연의 연출가치곤 너무 (20대로 보였다) 젊었다.
어쨌든 인터뷰를 그럭저럭 끝내고 주섬주섬 장비들을 챙겨 나가다가 다시 김철리 예술감독과 마주쳤다. "근데 칠레 연출가가 무지 젊데요?" "요즘은 세계 어느 공연 페스티벌을 가나 다 그래요. 연출가들이 다 젊어. 20~30대야. 거장의 시대가 갔어요."
50대 중반 연출가의 듬성한 머리에서 꼬불꼬불한 긴장감을 잃은 퍼머 머리가 흐느적거리며 흘러내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거장', '마에스트로'란 말은 나에게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 말은 '천재'와는 달라서 특출난 재능 외에도 경륜, 지식, 인격, 카리스마 등등을 동반해야만 불릴 수 있는 훈장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 이 훈장은 외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돼버린 듯 하다. '거장'이란 말이 주는 품격은 부담이 되고, 거장의 신중함은 둔중함이 됐다. 임권택 감독같은 분이 영화 한 편 찍으면서 "내가 영화 한 편 찍으려고 업계의 짐이 되고"라면서 겸연쩍어 해야하는 세상인 것이다.
현대사회는 '빨리 키워, 빨리 쓰고, 빨리 버리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젊은 피 수혈'은 국가대표 축구팀에만 쓰는 말이 아니다.
이제는 대기업에서도 20대 임원이 뉴스가 아니고, 30대 CEO도 뉴스가 아니다. 하물며 기민함과 기발함, 창의성으로 승부하는 예술계는 오죽하랴.
하지만 혁신 못지않게 성찰 또한 예술이 사회에 제공해야 할 중요한 덕목이기에 재기만 번뜩이는 젊은 예술가는 아직 펼쳐보이기 역부족인 숙성된 '아트'를 책임감있게 세상에 던질 바로 그 '거장'의, "시대가 갔다"는 50대 예술가의 말은 착잡하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