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끼니꾸 드래곤’(용길이네 곱창집, 5/20-25, 예술의전당)
누구에게나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 해가 있다. 2002년은 ‘서울 월드컵’이 열렸던 해고 난 기자였다. 전국의 월드컵 경기장을 다니며 취재했고 안정환의 골에 환호성을 질렀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해고 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날은 무더웠고 텔레비전은 매일 우리나라 선수들의 금메달 소식을 쉴 새 없이 전하고 있었지만 난 입시공부를 했다. 1980년에는 ‘광주항쟁’이 일어났고 난 당시 광주에서 국민학교 4학년생이었다. 총을 든 군인들, 불안해하는 부모님, 장갑차를 탄 대학생들을 봤고 애타게 울부짖는 새벽의 절규를 들었다.
1970년.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의 극작가인 재일동포 2.5세 정의신씨에게는 1970년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해다. 간사이 지방 오사카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고 그 바람에 함석지붕 밑에 살던 재일동포들은 쫓겨나야 했다. 당시 그의 가족은 오사카 근처 히메지의 낡은 판자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국유지인 그 땅에서 고물상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된 1970년은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접어든 시기입니다. 만국박람회로 사회는 활기가 넘쳤고 미래는 멋지다는 것을 누구나 믿고 있었지만, 이면에는 그 미래를 위해 희생되고 잊혀져간 사람들이 있었죠"
(중략)
"국유지를 샀다고 하시는 우리 아버지께 제가 아무리 아버지 국유지를 매매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라고 말씀드려도 ‘난 이 땅을 간장 장사하던 사토씨한테 샀어’하고 완강하게 주장하셨습니다. 그것은 ‘야끼니꾸 드래곤’에 나오는 이야기와 똑같으며 ‘야끼니꾸 드래곤’ 극중에는 우리 가족들의 실제 추억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이니치(재일동포)’는 좋은 직장을 구하기 힘들다며 일본에서 굶지 안고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늘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힘들지만 어떻게든 오늘을 살아야만 했던 아버지의 고생 덕분에 다섯 형제는 모두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 약사, 치과의사 그리고 일본에서 인정받는 극작가가 됐다.
1970년. 간사이 지방 공항 근처 함석지붕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빈민촌, 그곳에 주인공 김용길이 살고 있었다. 김용길은 일본사람들이 먹지 않고 버린다는 곱창(야끼니꾸)을 구워 팔며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용길은 작가 정의신의 아버지처럼 국유지인 그 땅을 일본사람에게 샀다고 말했다. 고향을 떠나 험난한 삶을 살아온 용길, 그러나 그의 세 딸과 아들 역시 자신의 삶처럼 순탄하지 못했다.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는 딸들, 학교에서 이지메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하고 만 아들. 용길의 삶은 주름진 곱창이 벌건 연탄불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쪼그라지듯 굴곡졌다.
“그때 당시 재일동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야끼니꾸(곱창구이), 빠찡코같은 일밖에 없었습니다. 재일동포하면 야끼니꾸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야끼니꾸는 그런 재일동포의 상징적인 단어입니다”
만국박람회 때문에 용길은 살던 곳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이른바 강제철거였다. 일제에 끌려 나간 전쟁터에서 한쪽 팔을 잃은 용길은 그 강제 철거 앞에서 절규했다. ‘내 한쪽 팔을 빼앗아 가고 내 아들도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내 땅마저 빼앗아 가느냐...내 아들을 돌려줘...’하며 울부짖지만, 용길은 결국 그 땅에서 쫓겨나고 만다.
“일본에서 ‘야끼니구 드래곤’을 공연했을 때 재일한국인의 이야기고 거의 개인적인 이야기인 것 같은 이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 완전히 미지수였습니다. 아무리 ‘한류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재일한국인의 머리 위를 뛰어넘은 것이고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이웃과 다름없는 재일한국인을 돌아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차피 재일한국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니까 실컷 재일한국인의 이야기를 해 줄거야’라는 마음으로 반 정도는 악의를 담고 ‘야끼니꾸 드래곤’을 썼고 제발 재일한국인에 대해서 이해해주십시오하는 소원을 담고 연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한 재일동포의 슬픈 가족사로만 끝나지 않았다. 아들을 잃긴 했지만 용길은 아버지로서 남은 세딸들이 각자의 행복을 찾도록 해 준다. 큰딸은 북한으로 작은딸은 남한으로 그리고 막내딸은 일본 사람과 결혼해 일본에 남는다. 그리고 용길은 아내와 단둘이서 리어카를 끌고 황량한 함석지붕촌을 떠난다. 때마침 하얀 벚꽃이 눈처럼 떨어진다. 어느날 아들과 함께 함석지붕 위에서 봤던 그 벚꽃을...................그때 아들의 영혼이 함석지붕위에 나타나 소리친다. ‘맨날 대낮부터 술만 먹는 사람들, 서로 싸우는 아줌마들, 냄새하는 시궁창, 난 이곳이 너무 싫었습니다’하며 절절히 외친다. 그러나 아들은 흐느끼며 절규했다 ‘그러나 그렇게 싫었던 이 곳이 난 너무 좋았습니다. 사실은 너무나 좋았습니다’라고......
용길은 하얀 벚꽃을 보며, 하얀 벚꽃이 쌓여 복숭아 빛으로 변한 함석 지붕을 보며, 그리고 아들이 꼭 있을 것만 같은 그 곳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참 기분 조오타. 이런 날은 내일을 믿을 수가 있지. 설령 어제가 어떤 날이였다해도. 내일은 꼭 좋은 날이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용길은 아내와 함께 떠나고 아들의 영혼은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든다. 무대에는 하얀 벚꽂이 눈처럼 내리고...........................................나의 눈가는 조용히 촉촉해졌다.
일본 관객들은 우리나라 관객처럼 잘 웃거나 박수를 치거나 그리고 소리내어 울지도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지난 4월 정의신씨의 이 작품은 일본 관객들을 소리내어 흐느끼게 만들었다고 한다. 한 재일동포의 슬픈 가족사를 뛰어넘어 한 아버지의 인생사가 한 인간의 인생사가 일본 관객의 마음을 울렸을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 용길처럼 삶에 지친사람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힘든 삶을 살아도 그 삶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바로 “살아간다는 것.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난 이 연극을 보고나서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 너무나 가슴에 박혔다. 용길의 마지막 말이 슬프고도 애잔하게 내 가슴을 울렸다 “참 기분 조오타. 이런 날은 내일을 믿을 수가 있지. 설령 어제가 어떤 날이였다 해도. 내일은 꼭 좋은 날이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 그게 살아간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설령 어제가 어떤 날이었다 해도, 내일은 꼭 좋은 날이 올 것 같다는 희망을 갖고........<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