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한국토지공사. 노동조합에 가입한 직원들은 열흘여전부터 검은색 조끼를 입었다. 본사 정면에는 천막을 치고 철야농성도 벌이고 있다. 천막 한 가운데 '철야농성 12일째'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최근에는 직원들의 가슴에 리본도 달렸다. 통폐합에 반대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정부의 통폐합 방침이 알려지면서 '직장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토지공사 직원들을 농성장으로 내몰고 있다.
비단 토지공사만 그런 것은 아니다. 통폐합 또는 민영화 대상으로 거론되는 공기업 직원들은 너나없이 초조감과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공기업·공공기관의 개혁안 마련에 착수하면서 공공기관 직원들의 한숨소리가 커져 가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신의 직장'으로 불리며 일반 기업 직원들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지금은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만을 바라야 하는 신세가 됐다.
특히 민영화나 통폐합 대상으로 거론되는 기관의 직원들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정부의 개편안이 아직 최종 확정되지 않은 만큼 통폐합 등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있지 않지만 앞으로 몰아닥칠 구조조정의 태풍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 더 많다. 민영화.통폐합과 거리가 먼 기관들도 대규모 인력감축은 불가피할 게 확실시되고 있어 한숨짓기는 마찬가지이다.
일부 사업을 민영화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힐 가능성이 있는 한국도로공사. 겉으로는 다른 기관에 비해 느긋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좌불안석이다. 한 직원은 "일상적인 일은 하고 있지만 새로운 업무를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며 불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토지공사와 통폐합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혀 가고 있는 주택공사. 정부가 방침을 정하기 전에 이미 '통폐합하자'고 나섰던 것을 보면 주택공사 직원들은 뜻을 이룬 셈이다. 그러나 불안하기는 토지공사 직원들 못지 않다. 한 직원은 "민간이 할 수 있는 업무를 못하게 하는 데다 토지공사와 중복되는 업무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대규모 인력감축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여 직원들의 동요가 심하다"고 전했다.
에너지 관련 공기업들도 민영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면서 초조하기는 마찬가지다. 전력과 가스 등 규모가 큰 핵심분야는 독점발생 가능성과 공공요금 인상 가능성 등으로 민영화를 피할 가능성이 커져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지만 그도 잠깐. 구조조정의 칼날은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에너지 공기업의 한 관계자는 "우리 회사는 성격상 민영화 대상은 아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구조조정은 불가피할 것"이라며 "아직 지침이 내려온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일정비율을 줄이는 식이 된다면 적잖은 피해가 우려돼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하다"고 전했다.
민영화가 추진될 기관은 앞으로 일어날 급격한 환경변화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그나마 민영화되더라도 발전설비 정비나 발전소 설계 등 '지식집약형' 공기업인 한국전력 그룹사 직원들은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다.
한 그룹사 직원은 "민영화가 돼도 독보적인 영역을 갖고 있기 때문에 회사 영업사정 등이 나빠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본다"면서도 "아무래도 민간기업으로 바뀌면 회사 분위기나 상황이 좀 더 타이트해질텐데 그 점이 걱정스럽다"고 불안감을 내비쳤다.
금융 공기업 소속 직원들도 개혁의 폭과 수위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 기관인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은 한동안 잠잠하던 통합론이 최근 다시 불거지자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두 기관은 지원 대상이나 하는 일이 비슷하다 보니 중복 보증 등이 심각한 문제로 지적돼 왔으며 2004년 기획예산처가 통합을 권고하기도 했다.
기보 관계자는 "중복 보증을 해소하고 기술평가에 의한 보증을 늘리는 등 전문성을 키워왔는데도 통합론이 나와 당혹스럽다"면서 "새 정부 인수위 때 기술금융의 선진화가 주요 192개 과제 중 하나로 채택됐던 만큼 기술금융을 발전시켜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우리금융지주는 회장과 우리은행장, 경남은행장, 광주은행장 등 4명의 최고경영자(CEO)가 모두 정부의 재신임 심사에서 탈락하면서 일상 업무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직원들은 또 민영화 과정에서 경쟁 은행에 인수될 경우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이뤄질 수도 있어 불안해 하고 있다.
민영화를 앞둔 기업은행도 역시 민영화의 시기와 방법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산업은행보다 민영화가 더 빨리 진행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직원들은 독자생존이 아닌 다른 은행에 인수되는 쪽으로 민영화가 결정될 경우 향후 구조조정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내심 불안해 하는 모습이다.
자산관리공사의 한 직원은 "15년 가까이 일하는 동안 공기업 개혁 이야기가 많이 나왔지만 이번이 가장 큰 폭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무겁다"고 말하기도 했다.
의외로 공기업 내부에서 구조조정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는 지적도 나온다. 발전산업노조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한 발전사 직원은 "민영화가 안되더라도 조직개편은 반드시 필요하며 할 일 없이 연봉만 축내는 직원들의 직급도 낮춰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또 다른 공기업의 한 직원도 "그동안 지나치게 방만하게 경영해 왔던 부분도 있었다"고 인정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