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성곽 남대문인 숭례문 문루가 어처구니 없는 방화로 소실된지 20일로 100일을 맞는다.
그간 불타고 남은 부재를 수습해 경복궁 보관소로 옮기는 현장수습을 거의 마무리한 문화재청은 2009년 12월까지 고증, 설계 등의 절차를 거친 뒤 2010년 1월부터 본격적인 복원공사를 벌여 2013년 1월1일에는 숭례문을 시민들의 품에 다시 돌려놓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그 100일 사이 불탄 숭례문의 처참한 장면이 던져주던 충격이 가라앉으면서 '대한민국 자존심이 무너졌다'며 이런 비극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요란한 외침도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화재발생 하루 뒤인 2월11일 현장을 방문해 사고수습과 복구방안에 관심을 보이긴 했으나 현재 문화유산의 앞날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적어도 문화유산계에는 없어졌다.
그런 심상치 않은 징후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문화재를 겨냥해 개발 현장 곳곳에서 걸림돌이라는 뜻의 '전봇대'라는 구호가 난무하기 시작한 대목을 문화유산계는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충남 당진의 한 반도체 공장 예정지에서는 매장문화재 발굴 일정 때문에 공장설립이 늦어진다며 중장비를 동원해 발굴현장을 무단파괴한 사업주가 매장문화재를 지칭해 뽑아 버려야 할 '전봇대'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기도 했으며, 문화재로 인한 사유재산권 행사 제한에 반발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주민들의 피켓 현장에도 '전봇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고고학회장을 역임한 최병현 숭실대 교수는 "현정부가 경제개발에 치중하면서 문화재를 그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숫제 전봇대 취급하는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면서 "최근 문화재청과 국가경쟁력위원회가 대통령에게 보고한 문화재 지표조사 절차를 생략하겠다는 내용의 '문화재조사 제도개선안'이란 것도 그 일환"이라고 말했다.
불교문화유산에 관여하는 한 인사는 "2005년에 낙산사가 불타고 올해 남대문이 소실되었을 때만 해도 솔직히 많은 문화유산계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잘 됐다는 인식도 꽤 많았다. 개발논리를 앞세운 이들에게 나름대로 이런 사건들이 경종을 울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숭례문 화재) 이후에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숭례문 화재가 정책 당국자들에게 준 영향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당장 문화재청만 해도 인력과 예산을 10% 삭감하라는 새 정부의 지침에 밀려 이미 올해 예산에까지 반영된 인력 28명 증원 계획이 물 건너갔으며 인력 충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기존 인력 11명을 각 부서에서 차출해 '숭례문 복원 추진단'을 꾸려 운영하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으로 촉발된 목조문화유산 방제대책 마련을 위한 예산 또한 다른 부문의 기존 예산에서 전용하는 방식을 택하는 바람에 그만큼 다른 분야 지원을 약화시키고 있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복구에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는 200억원 이상의 예산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문화재청에서는 "설마 그 예산까지 깎지는 않을 것"이라고 비교적 낙관적인 예상을 내놓긴 한다. 하지만 문화유산계에서는 "다른 문화재 부문 예산을 빼내와서 숭례문 복구에 전용하는 방식을 채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최근 정부와 지자체, 건축주 등이 앞세우는 경제개발 논리에 밀려 문화유산이 더욱 더 설 땅을 잃어간다"면서 "문화유산이 개발을 가로막는 '전봇대'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