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아티스트가 대학원까지 가는 이유를 아십니까? 장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연극 방송 영화 디자인 음악 라이팅(writing)등 멀티미디어 시대에는 다전공으로 경쟁해야 합니다. 액팅 포 시네마(Acting for cinema), 액팅 포 드라마(Acting for drama), 액팅 포 시어터(Acting for theater)등 연계 통합 교육 프로그램으로 당신의 전공은 새로운 눈을 뜨고 경쟁력이 높아집니다'
최근 서울에 있는 한 예술대학이 일간지에 학생 모집 전면 광고를 냈습니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한 동문을 '월드스타'(도대체 이 말은 누가 만든 건지, '월드뮤직'만큼이나 궁금하네요)라며 대문짝만하게 사진을 실어 앞세운 이 광고에서 눈길은 끈 건 바로 위 문구였습니다.
문구 어디를 봐도 '외국의 아티스트가 대학원까지 가는 이유' 는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문화예술 분야에서 장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한 요즘입니다.
과거에는 주로 음악 분야에서 클래식 연주자들이 재즈나 대중음악적인 요소가 가미된 연주를 하는 것을 일컬어 '크로스오버'라고 했습니다. 이름처럼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죠.잘 아시는 것처럼 얼마 전 타계한 루치아노 파바로티나 안드레아 보첼리, 사라 브라이트만같은 성악가들이 이런 크로스오버 음반을 내서 세계적으로 히트했습니다.
이런 시도는 음악이라는 특정 장르 내에서 벌어진 현상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학술 분야에서도 '통섭'(Consilience)과 학제 간 연구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처럼 문화영역에서의 크로스오버도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일단 쉽게 떠올려볼 수 있는 것이 특히 올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무비컬입니다. 이미 <라디오스타>, <싱글즈>, <밴디트>, <나인>등이 공연 중이고 앞으로도 <이블 데드>, <내 마음의 풍금>, <미녀는 괴로워>,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등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스토리라인만 같을 뿐 영화와 뮤지컬은 전혀 다른 장르로, 제각각의 감상 공간에서 서로 다른 장르의 문법을 이용해 상영 또는 공연되기 때문에 엄밀히 얘기해서 장르의 경계가 무너졌다거나 크로스오버라고 보긴 어렵지만 관객의 마음 속에서 장르의 벽이 무너지는 것만 큼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무비컬같은 형태의 장르와 장르의 만남은 문학과 영화의 만남이라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최근에도 <점퍼>라는 소설이 국내에서 출간된 직후 곧바로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마케팅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서죠. 몇 년 전에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고전이 영화화되고 그 영화를 본 현대의 관객들이 다시 문학에서 자신이 영화로 본 것을 확인하는 바람에 베스트셀러 순위가 뒤바뀌기도 했습니다.
이런 추세에 따라 요즘은 애초에 문학 작품이나 대본을 쓰는 단계부터 다양한 장르로 소화할 것을 염두에 두는 것도 낯선 일이 아닙니다. 기술의 발달로 어떤 상상력도 비주얼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런 현상은 두드러지는 것이겠죠. 영화 <반지의 제왕>,<트랜스포머> 등은 문학적 혹은 만화적 상상력이 영화에서도 표현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요즘 특히 주목할 만한 크로스오버는 장르는 그대로 두고 크리에이터들이 경계를 넘나드는 겁니다. 이를테면 연극 연출가가 영화를 연출하고 영화 감독이 연극을 연출하는 것 등이지요. 심지어 연극 연출가나 영화 감독이 발레를 연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해에는 연극 연출가 양정웅 씨가 유니버설 발레단의 발레뮤지컬 <심청>을 연출했습니다. 또 올해 국립극장과 성남아트센터 등지에서는 중국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장이모우가 연출한 중국 국립발레단의 <홍등>이 국내 초연합니다.
그런가하면 대학로에서는 장진 감독과 영화 <화려한 휴가>의 김지훈 감독이 연출한 연극 <서툰 사람들>과 <늘근 도둑이야기>가 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죠. 장진 감독의 얘깁니다.
"요즘은 테크니션들이 상당히 좋기 때문에 작가 입장에서 매체(미디어)를 대하면 편해지는게 있어요. '나는 상상을 할테니까 여러분들이 만들어주세요'라고 얘기를 하면 진짜 만들어져요. 예를 들면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서 정말 좋은 배우들을 만나서 공들여서 쓴 텍스트를 그들에게 주면 그들이 너무나도 잘 구체화시켜주고, 그리고 내가 영화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서 촬영이나 조명, 미술, 시각효과하시는 분들에게 드리면 그게 어떤 그림으로 펼쳐질지 디자인이 나오고. 어떻게 보면 프로듀서 혹은 작가적인 마인드로 연출을 가는 시대이다보니까 그 지점에 있어서는 걱정하는 것보다는 수월한 것 같아요."
결국 철저한 분업화와 전문화, 기술의 발달 등등으로 한 사람의 크리에이터가 예술품 창작의 전 과정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 크리에이터의 크로스오버 현상을 가져온 것일 겁니다.
또 다른 배경으로는 흥행 안정성의 확보라는 상업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겠네요. 스타 배우만큼이나 스타 작가, 스타 연출가가 주목받는 시대니까요.
하지만 장르 내 크로스오버든, 크리에이터의 크로스오버든 검증된 스토리, 검증된 실연자, 검증된 연출자만 살아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뭔가를 시도해볼 기회조차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세계화 시대의 승자독식 상황이 문화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도 없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