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백성을 도탄에 빠트렸던 얼치기 좌파의 득세를 종식시킨 위대한 보수우익실용정권을 이끌어나갈, 각계각층의 다양한 목소리를 단순한 걸림돌로 생각해 과감히 무시할 정도로 강력한 추진력이 돋보이는 새 대통령 취임식이 성대히 열리는 25일, 태평양 건너 할리우드에서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립니다. 작가 조합의 장기간 파업으로 개최 여부가 불투명했지만 노사간 극적 타결로 시상식이 열리게 됐습니다. 작가들이 파업하는데 왜 골든글로브가 파행으로 치달았고 아카데미 시상식도 위협받았을까 궁금했는데 바로 시상식을 빛내줄 스타들이 파업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목숨 줄을 쥐고 있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 맞서 작가 파업을 지지하고 또 일정 정도 성과를 이끌어내는 모습을 보니 참 부럽더군요.
이번 주에는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 5편 가운데 세편이 나란히 개봉됩니다. [주노],[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어톤먼트]가 그 영화들인데요. ‘아카데미 후보작만 영화냐’며 발끈할 다른 영화 6편과 함께 선보이는데 ‘요즘 극장가서 볼만한 영화가 없어’하시는 다소 고급 취향 관객분 들에게는 어떤 영화를 골라야 할지 즐거운 고민을 안겨줄 것 같네요.
[주노] (감독: 제이슨 라이트만, 주연:엘렌 페이지, 마이클 세라, 12세 관람가)
'세상에 어찌 이렇게 깜찍하고 당당한 소녀가 있을까?' 캐나다 출신 21살의 여배우 엘렌 페이지가 연기한 주인공 주노를 보며 든 생각입니다. 올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각본상 후보에 올라 있습니다. 개인적인 예측으로는 여우주연상 부문에서 [라비앙로즈]의 프랑스 여배우 마리온 코티아르와 치열한 경합을 벌인다면 좋을 것 같네요.
슬래셔 무비와 하드코어 음악을 즐기는 여고생 주노(엘렌 페이지)는 성에 대한 호기심 끝에 자신이 주도적으로 평소 점찍었던 같은 학교 달리기 선수 블리커(마이클 세라)와 첫 경험을 갖습니다. 거실 소파 위에서 거사를 치른 주노는 약 두 달 후 자신의 뱃속에 새 생명이 자란다는 사실을 알고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인 낙태를 결심하고 병원을 찾지만 이미 뱃속의 아기가 손톱까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아기를 낳기로 결정합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고등학생으로 양육의 부담까지 걸머지겠다는 것은 아니고 벼룩시장에 난 광고를 보고 믿을 만한 양부모에게 입양하기로 결정하는 것이지요. 출중한 외모와 남부럽지 않은 재력에다 부부간의 금슬도 좋아보이는 바네사(제니퍼 가너)와 마크 부부를 점찍고 변호사 입회하에 입양 계약을 합니다. 배는 점점 남산만큼 부풀어올라 학교에서도 별종 취급을 받느라 힘겨운데 출산과 입양 전선에도 어두운 먹구름까지 끼어 더욱 힘겹게 합니다. 깜찍한 주노는 이 역경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요.
콩가루보다 더한 막가는 집안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희망의 꽃을 피우는 [리틀 미스 선샤인]과 흡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영화입니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특징은 대사인데요. 위트와 통찰을 함께 담아 쏟아붓는 대사와 현재 미국 10대들의 유행어를 반영한 독특한 속어들이 곁들여집니다. TV 시리즈 [웨스트 윙]과 같은 사람이 각본을 쓴 [찰리 윌슨의 전쟁]과도 비슷한데 주조연 배우들 뿐 아니라 초반부 주노에게 임신진단 시약을 파는 덜떨어져 보이는 가게 주인까지 상당히 쿨해 보일 정도입니다. 영화 속에 펼쳐지는 몇몇 대사들은 상황과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며 두고두고 되씹을 정도로 영롱한 표현들도 있습니다. 아빠가 들려주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정의와 정자제공 외에는 아무런 역할이나 비중을 두지 않기로 했던 남자친구에게 다시 다가가 마음을 열며 사랑고백을 할 때 '별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내게 가장 쿨한 남자로 보이고, 다른 애들이 내 남산만한 배만 쳐다 보는데 내 얼굴을 봐주는 유일한 사람이다.'라는 사랑 고백도 멋지더군요, 스트리퍼에서 소설가로 극적인 변신에 성공한 뒤 첫 시나리오로 대박을 친 각본가 디아블로 코디의 내공과 실력이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냉난방 기술자인 고루한 아버지는 얼핏 생각하면 임신 소식 듣자마자 머리 빡빡 깎이고 무지막지하게 쥐어 팰 것 같이 생겼지만 주노가 힘들 때 곁에서 격려해주는 듬직한 모습이고 낳은 정은 없는 새엄마도 때로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애정 깊은 후원자입니다. 불임으로 고생하는 입양부모인 바네사도 모든 것을 갖췄지만 아기가 없으면 인생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간절한 예비엄마 연기를 훌륭하게 하는 등 캐스팅도 조화롭습니다. 도덕적 설교나 신파로 흐르지 않고 절묘한 줄타기를 하며 영화의 현실감을 채우는 것은 역시 엘렌 페이지의 탁월한 연기입니다. 아무 준비없이 덜컥 임신해버리는 것은 16살 나이에 걸맞지만 출산을 결심하고 입양부모를 결정하고 밀고나가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어른들 세계에서 벌어지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어떤 어른보다도 주체적이고 성숙한 결론을 내리고 밀어붙이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출산과 입양전선에 가장 큰 위기가 닥쳤다는 것을 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옆으로 난 철길에는 뱀처럼 긴 화물열차가 움직이고 주노는 차를 길 옆에 대고 뱃속의 아기를 어루만지며 흐느낍니다. 털털거리는 고물차를 운전하는 주노는 앞길이 캄캄해 멈춰서지만 느릿느릿 계속 이어지는 열차의 모습을 나란히 보여주는 것은 주노의 인생도 잠깐의 멈춤만이 있을 뿐 도도하게 흘러가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막힌 은유로 읽힙니다. 대견하게 출산에 성공하고 솔직하고 순수하지만 남편 내지는 가장으로서 역할은 커녕 제 앞가림도 못할 것 같은 아기 아빠와 침대에 누워 눈물 흘리며 짓는 미소와 더불어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성장영화이자 로맨틱 코미디이며 가족 드라마이기도 한 절묘한 칵테일인 [주노]는 성장기 청소년들에게도 어떤 훈계보다 생생한 반면교사를 제공해줄 수 있는 신선한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