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뉴스
LIVE

영국의 '풀뿌리' 무대 - "우리 아이가 공연해요"


Google 즐겨찾기에 SBS뉴스 추가

안녕하세요. 설날은 잘 보내셨나요?

숭례문 화재 소식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문화재일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지인의 글을 읽고 나니 더욱 그렇네요. 무너져내린 숭례문 사진을 보면서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숭례문을 봤던 기억을 되살려봅니다.

오늘은 영국의 어린이 공연 얘깁니다. 학예회라고 할까요, 어린이들이 직접 무대에 서는 공연들 말입니다. 제 딸의 '영국 무대 데뷔(?)'를 보면서 느낀 점을 적어봤습니다. 저뿐 아니라 제 아이들도 영국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아이들을 통해서 영국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볼 기회를 더 많이 얻는 것 같습니다. 이번달 세종문화회관 월간지 '문화공간'에 기고한 글이고, 제 블로그(http://ublog.sbs.co.kr/shkim0423) 에도 올렸습니다.

------------------------------------------------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광고
광고 영역

영국 영화 ‘러브 액추얼리(Love Actually)’에는 아이들 학예회 얘기가 나온다. 영화를 보면서 영국 사람들은 이 학예회를 유별나게 중요한 행사로 여기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영국에 와서 실제로 살아보니, 과연 그렇다. 아이들이 출연하는 ‘공연’들이 참 많고, 사람들의 관심도 크다. 여덟 살 난 큰 딸 은우가 지난 연말 합창단의 일원으로 영국 무대에 ‘데뷔’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공연 이름은 코랄 네트워크 콘서트(Choral Network Concert). 은우는 워릭셔 카운티(‘카운티’는 영국의 행정 단위)의 ‘중부 소녀 합창단(Central Area Girl's Chorus)’ 소속이었다. ‘중부 소녀 합창단’이라고 하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워릭셔 카운티 뮤직 서비스(우리 식으로는 시립 음악교육 센터 정도 될 것 같다)에서 운영하는 '중부 뮤직센터(Central Area Music Centre)'에서 1주일에 한 번, 1시간씩 노래를 배운 아이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은우가 출연한 공연은 그러니까 이런 뮤직센터에서 음악을 배우는 어린이, 청소년 합창단들이 함께 출연하는 콘서트였다. 

한국에 있을 때 은우 학교 강당에서 열리는 공연에 몇 번 가 본 적이 있다. 솔직히 객석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여기저기서 휴대 전화 벨소리가 울려대고, 공연이 시작돼도 굉장히 어수선해서 무대에 집중하기 어렵다. 대부분 자기 아이 출연할 때 무대 바로 앞까지 나가 사진을 찍거나 비디오 녹화를 한다. 좀 더 좋은 장면 잡으려고 이리저리 이동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 아이 순서 끝나면 나가버린다. 그래서 공연이 끝날 때쯤 되면 객석은 마지막 출연자의 부모를 빼고는 거의 빈 상태가 돼 버리기 일쑤다. 그 때는 아이들 학예회가 뭐 다  그렇지, 했었다.

그런데 은우가 출연한 공연을 보니 사뭇 다르다. 물론 관객의 대다수가 출연하는 어린이의 친지나 가족이라는 점은 같다. 하지만 뭔가 격식을 제대로 갖춘 분위기다. 일단 입장료를 내야 했다. 어른은 4파운드, 어린이는 2파운드(1파운드는 우리 돈으로 2000원 조금 안 되는 돈이다). 공연이 열린 곳은 집 근처 워릭 스쿨의 강당인 ‘가이 넬슨 홀’이었는데, 제법 규모가 컸다.

은우는 세 번째 출연 팀으로 나왔다. 흰 색 상의와 회색 혹은 검정색 하의를 맞춰 입고 나와 주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중심으로 세 곡을 불렀다. 모두 은우 또래의, 프라이머리 스쿨 3, 4학년(우리나라의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들이다. 사실 아이들의 노래 실력이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종종 가사나 음정을 틀리기도 하고, 박자를 놓치기도 했다. 노래에 맞춰 하는 율동도 순서를 잊어버려서 옆 출연자 눈치를 보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리 아이들이라 해도 이 정도 무대에 오르려면 좀 더 잘해야 할 것 같은데, 몇 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수가 나왔다.

하지만 객석 분위기는 웬만한 프로 음악가의 리사이틀을 보는 듯 했다. 노래가 끝나면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노래가 시작되면 진지하게 경청했다. 공연의 ‘완성도’보다는, 무대에 선 아이들을 격려하고, 함께 즐기는 데 의의를 두기 때문인 것 같다. 자기 아이가 나온다고 플래시 터뜨리며 사진 찍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사진을 찍더라도 그냥 앉은 자리에서 플래시 없이 몇 장 찍는 정도다. 자기 아이 출연하는 순서 끝났다고 나가 버리는 사람도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출연자석에 앉아있는 은우를 찾아가니 상기된 표정으로 ‘우리 팀이 제일 잘 했지?’ 하며 웃었다.

오프라인 본문 이미지 - SBS 뉴스

은우는 며칠 뒤, 뮤직 센터에서 크리스마스 자선 콘서트 초청장을 또 받아왔다. ‘Dear Singer' 앞으로 된 초청장에는 워릭셔 카운슬 주최로 열리는 자선 공연에 출연해 달라고 돼 있다. ’Chairman's Charity Concert'로 이름 붙여진 이 공연에는 카운티 윈드 밴드와 은우가 소속된 합창단이 출연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티켓 가격도 7파운드로 더 비싸고, 공연 장소가 타운 홀인 것을 보니 좀 더 비중 있는 무대인 듯하다. 정작 공연 때는 일정이 안 맞아 은우는 출연하지 못했는데, 은우 뿐 아니라 나도 안타까웠다.

은우가 다니는 뮤직 센터는 노래 뿐 아니라 다양한 교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합창 프로그램은 무료이고, 악기 개인 교습도 수강료가 굉장히 저렴하다. 뮤직 센터에서는 수강생들이 개인 교습 외에 앙상블이나 오케스트라, 합창단에 참여할 것을 권장한다. 그래서 뮤직 센터에서 음악을 배우는 아이들은 대부분 ‘여럿이 함께 음악을 만드는’ 활동에 참여하고, 어떤 식으로든 무대에 설 기회를 갖게 된다.

크리스마스 즈음해서 이런 공연들이 특히 많은 것 같다. 한 번은 친하게 지내는 집 아이가 출연하는 플루트 콘서트에도 갔었다. 플루트 배운 지 한 달밖에 안된 아이들부터, 몇 년씩 배워서 꽤 수준 높은 연주를 들려주는 아이들까지, 모두 차례로 무대에 섰다. 객석 분위기는 역시 진지했다. 중간에 인터미션까지, 2시간 가까이 열린 공연을 모두 끝까지 조용히 경청했다. 이 공연도 2파운드씩 입장료를 받아서 자선기금으로 낸다고 했다.

광고
광고 영역

우리나라의 어린이집과 비슷한 ‘너서리(nursery)’에 다니는 세 살배기 둘째 은형이도 무대에 섰다. 너서리와 같은 건물에 있는 프라이머리 스쿨 강당을 빌려서 열린 ‘첫 번째 크리스마스’ 공연이었다. 너서리 선생님들이 해설을 맡고, 어린이들이 각각 역을 맡아서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를 연극으로 공연했다. 두 살에서 네 살까지 아이들이니 사실 제대로 된 연극을 보여줄 리는 없다. 그래도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무대에 나와서 율동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은형이는 동방 박사가 타고 온 낙타 역을 맡았다. 낙타 옷을 입고 동방 박사 역을 맡은 남자 어린이와 손을 잡고 나와 무대를 한 바퀴 돈 게 ‘연기’의 전부였지만.

이 공연은 아침 11시에 열렸는데도 엄마 아빠가 다 온 경우가 많았다. 다들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아침부터 공연 보러 왔나 보다. 그만큼 이 사회가 아이들이 출연하는 공연을 중요한 행사로 여긴다는 증거일 것이다없었지만, 관객이 조금씩 내는 돈은 모아서 근처 어린이 보호 시설에 기부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아이들이 출연하는 공연이라도 공짜는 거의 없다. 대부분 조금씩이라도 입장료를 받고, 수익은 자선기금으로 기부하는 경우가 많다. 적은 돈이라도 이렇게 입장료를 내고 나면, 아무래도 좀 더 진지한 태도로 공연을 보게 되지 않을까. 이건 은우가 출연한 콘서트를 돈 내고 보면서 내가 실감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무대에 선 어린이들이 모두 커서 예술가가 되는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오랜 추억이 될 ‘예술적 체험’을 하게 되는 셈이다. 또 관객들은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공연을 즐길 기회를 갖게 된다. 은우의 영국 무대 ‘데뷔’를 보면서 이런 공연들이 어쩌면 ‘문화 선진국’으로 여겨지는 영국 문화의 밑바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면 너무 비약일까.

영국의 이런 공연들은 ‘지역 사회’ 차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한국에도 이런 ‘풀뿌리’ 공연이 많아지면 좋겠다. 거창한 무대가 아니더라도, 높은 수준은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평소 갈고 닦은 실력을 자랑스럽게 선보일 수 있는 공연 말이다. ‘우리 아이가 얼마나 잘하나’에만 신경 쓰는 학예회 말고, 우리 아이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은 뭘 하는지, 모두 함께 어울려 어떤 무대를 만들어내는지, 진지하게 봐주고 격려하는 공연 말이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광고
광고 영역
광고
오늘의 숏뉴스
숏뉴스를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이 시각 인기기사
기사 표시하기
많이 본 뉴스
기사 표시하기
광고
광고
광고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