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전이 막판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번 대선을 두고 '희안한 대선'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봐도 좀 이상하긴 합니다.
처음 투표권을 행사했던 87년 대선 이후로 이렇게 많은 후보가 본선에 나선 경우가 없었습니다. 심대평 후보가 사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11명의 후보가 남아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양측에서 모두 후보가 갈라져서 나온 것도 특이한 대목입니다.
여기에 명색이 여권을 대표하는 후보가 이렇게 맥없이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막판까지 온 것은 정말 특기할 만한 일입니다. 또 있습니다. 과거 경선에 불복해서 탈당해 출마한 후보는 있었지만 경선에 참여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다가 막판에 그냥 탈당해서 출마하는 일도 흔한 일은 아닙니다.
물론 어느 대선 때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정책 대결 보다는, 흔히 네거티브 공세라고 부르는 과도한 비방전, 비난전은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 선거 때만 되면 율사들이 전면에 나서는 희안한 전통도 이번에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우리 대선에서 건전한 국민들이 시선을 거두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물론 대선전이 워낙 일방적으로 흘러가다 보니 사람들이 흥미를 갖기 어렵게 된 면도 있습니다만...
율사들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번 대선은 특히 심한 것 같습니다. 각 당마다 법률 지원단이라는 게 있는데 능력있고 야심있는 율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습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내는 한편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하는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들의 일을 들여다보면 제대로 된 법률 전문가로서의 업무를 수행한다기 보다는 뭔가 시비거리 찾아내거나 무리한 법논리를 동원해 핑계거리 찾아내는 게 대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런 일은 율사 출신 의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직 판사, 검사, 변호사라는,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엘리트 전문직 출신이라는 신뢰도를 한껏 이용해 국민앞에 서기는 합니다만 실상은 그런 전문직 출신에 맞는 신중한 언행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한쪽에 선 법률가들은 무지막지한 저격수가 되고 반대쪽은 막무가내식 변명만 늘어놓기에 급급합니다. 이래서는 이들이 대표하는 전문직의 자존심 같은 것은 정말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변호사라고 하는 직업이, 어느 나라에서나 전문직으로 대접받고 사회적으로 존중을 받는 것은 나름대로 일정한 직업 윤리를 중시하고, 틀릴 수는 있더라도 대놓고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라는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변호사가 흔한 나라에서도 변호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입니다. 하물며 미국보다 변호사 수도 훨씬 적고 사회적인 대우도 더 나은 우리 나라에서야 오죽할까요. 하지만 여의도 정치판에서 만나는 율사들은 그런 전문직의 자존심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 같습니다.
(물론 항상 그렇듯이 여기에도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는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근본에 충실하려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이번 대선은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대선판은 거의 BBK 수사를 중심으로 흘러왔습니다. 한나라당 경선도 그랬고 그 뒤 본선도 그렇게 진행돼 왔습니다. 지난 5일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끝으로 막을 내릴 거라고 기대한 사람도 많지 않았겠지만 상황은 더 악화됐습니다. 검찰의 발표에도 약간 의아스런 대목이 있었습니다만 정치권은 그 의아스러움, 2% 부족한 것을 몇 십 배로 확대 재생산해내고 있습니다. 급기야 헌정사상 처음으로 특정 사건을 수사했던 수사검사와 부장, 차장검사에 대한 탄핵 소추가 거론되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래저래 BBK 사건 수사를 통해 현직 검사들이 이번 대선전의 가장 핵심 인물이 됐습니다. 어떤 사건이든 직접 대상자의 소추 여부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얘깃거리들이 따라붙게 돼 있습니다. (신정아 씨 가짜 학위 사건을 생각해 보시면 잘 상상이 가시죠...) 그런데 많은 경우 그런 얘깃거리들이 사안의 본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도 있고 아예 그쪽이 더 큰 일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역시 신정아 씨 가짜 학위 사건이 청와대 정책실장의 구속은 물론 쌍용그룹 김석원 전 회장의 비자금 사건으로 번진 것을 생각해 보시죠...)
따라서 검찰 입장에서는 어차피 법정에 가서 판사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원래의 기본적인 사실과는 상관없이 이런 부수적인 사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정치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겁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죠.
그럼 이번 경우는 어떨까요. 수사팀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대선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사 발표 과정에서의 다소 지나친 단정적인 표현들, 그리고 부수적인 사실들을 둘러싼 의문들에 대한 단호한 입장 표명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만나 본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검찰이 내린 '주문' (핵심 결론)에 의문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굳이 왜 그런 식으로 발표를 했는지 의아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제법 됐습니다. 바로 부수적인 얘깃거리들에 대한 처리가 문제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바로 지금과 같은 소란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안 그래도 율사들이 전면에서 설치고 있는 이번 대선에 아예 검찰은 선거판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와버린 셈이 됐습니다.
율사들이 설치는 선거는 일반 유권자들로서는 재미없는 선거입니다. 선거는 민의를 모아 정치적인 지도자를 뽑는 민주주의 정치과정의 최고의 행사입니다. 당연히 일반 유권자들이 선거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율사들이 설치기 시작하면 이건 법률 전문가들의 판, 심하게 말해서 하나의 사법 과정이 되어 버리는 것이니까요.
무엇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대선 과정에서 미국과의 범죄인 인도 조약에 대해서, 범죄인 인도 절차와 미국의 재판 제도, 영어로 된 소장, 이름도 알지 못하는 각종 전문 금융 용어로 된 주장들 속에서 머리 아파해야 합니까. 정말 경제가 문제라면 도대체 현 정부의 경제 정책과 후보들의 경제 정책은 어떻게 다른지, 말은 그럴싸하게 하는 이들의 정책에 어떤 헛점이 있는 건 아닌지 이런 것들을 따져볼 기회를 가져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언론의 책임도 있지만 이건 기본적으로는 링에 오른 선수들의 책임이 큽니다.
막판까지도 각 팀들은 경기장에 율사들을 대거 뛰게 할 모양입니다. 이제 겨우 아흐레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위안일 수도 있지만 허탈한 측면도 있습니다. 대운하 문제를 제외하고 공약을 놓고 사회적인 논쟁을 벌여본 게 없습니다. 공약집은 쏟아냈지만,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지역 공약 등등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하물며 같은 후보의 공약들 가운데 모순된 것이 있는지조차 우리는 훑어볼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당선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기왕 이렇게 정책에 대한 제대로 된 논쟁과 검증 없이 대선이 치러진 만큼 공약집에 들어있던 정책들이라도 모두 과감하게 원점에서 재검토해 주십사 하는 겁니다. 공약집에 넣어뒀으니 그것이 대국민 약속이라면서 밀어붙이지 말고, 제발 처음부터 국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타당성 검토도 해서 제대로 검증을 해서 실천에 옮겨 달라는 겁니다. 공약집 읽어보고 투표하는 국민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