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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에 서서 송전각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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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파고는 높았다.

남북 대군(大軍)의 두 선장은 그 높은 파도를 헤쳐나가지 못했다.

평양 국방장관회담에서 사흘낮 사흘밤 머리를 맞댔지만 끝내 '공동어로수역'을 정하지 못한 것이다.

남쪽 60만 대군의 선장은 김장수 국방장관이다.

기자는 김 장관이 평양으로 떠나면서 삼청동의 남북회담본부에서 취재진 앞에 섰을 때 기회를 놓칠세라 민감한 - 그러나 핵심적인 -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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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이 새로운 해상경계선 설정을 제의할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가 있는데 어떻게 대비하고 가십니까?"

"북측 입장에서 생각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논리대로 응해서 그 문제 때문에 다른 합의가 방해받는 일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측 수석대표인 김 장관의 공식적인 답변은 매우 신중한 것이었다.

회담이 끝나고 복기(復碁)를 해보니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좀 더 솔직하게 속내를 들여다보자.

그는 공식 회견 직전에는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근본문제를 제시하고 막가는 식으로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면 정상간 합의를 본 사항"이기 때문이다.

기대감이 묻어났다. 기자가 만난 전문가들의 예측도 같은 맥락이었다.

"(북측이) 민감한 문제는 제외하고 실용적 차원에서 공동어로수역 문제를 합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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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 재설정을 꺼내지 않고 공동어로수역, 해주 직항로 같은 경제적 실리를 챙길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NLL 문제를 '우회'하기로 전략적 결단을 내렸기 때문에 인민무력부장이 이 문제를 전면 제기할 가능성은 없다는 분석이었다.

심상치 않은 평양

대표단이 서해 직항로를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는 첫 소식을 접하기까지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순안공항에 인민군 장병들이 나와 도열해 있지는 않을까... 7년전 제주 국방장관회담 때처럼 장관에게 경례라도 한다면... 회담이 잘 되고 김정일 위원장이 남측 대표단을 접견하면 김장수 장관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10월 초 2차 정상회담 수행차 평양에 갔을 때 김정일 위원장과 악수하는 '꼿꼿한' 자세가 두드러져 주목을 받은 김 장관이니, 이번에는 또 어떨지 궁금했다.

평양 공동취재단의 1보가 날아왔다.

회담 장소가 '송전각'이란다. 당초 송정각이라는 국방부의 발표가 틀렸다는 것이다.

대동강변 솔밭에 있는 인민군 초대소라 '송전각(松田閣)'이란다.

'이런~ 지피지기면 백전불퇴라는데 '적진'으로 향하는 장수와 부하들이 어찌 담판장 이름조차 파악하지 못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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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이 좋지 않았다.

평양 순안공항의 화면이 들어왔다.

썰렁했다.

북측 차석대표인 김영철 중장이 영접을 나왔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측 대표단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고 내내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고 한다.

첫날 회담이 시작됐다.

"회담 분위기 어때요?"
"아주 팽팽해요."

평양 회담장의 긴장감이 직통전화선을 타고 서울의 남북회담본부까지 전해졌다.

기자는 방송 5개사 중 1명을 뽑는 공동취재단(pool) 추첨에서 탈락했으니, 공동취재단이 보내오는 소식을 따르면서도 나름대로 취재를 해 보기로 했다.

비관론이 지배적이었다.

"이번 회담에서는 기본적인 틀만 합의하고 구체적인 좌표설정은 장성급회담 등으로 넘길 수 있다고 정부 관계자가 전했습니다."

이틀째 오전 생중계 때부터 이런 보도를 내보냈으니 평양의 상황은 불보듯했다.

이날 저녁 평양에서 공동취재단이 보내온 화면에는 찬 기운이 묻어났다.

북측 110만 대군의 선장은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이다.

해군 출신으로 74살의 노장이다.

7년전 1차 국방장관회담때 제주에 왔다.

"북방한계선을 놓고 수구파 분들이 말씀을 많이 하는데... 이런 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동네 할아버지 같은 말투였지만 NLL 문제를 직접 언급했다.

김장수 국방장관은 "평행선을 가고 있는 분야가 많다," "원론적인 문제로 접근하기 어렵고 의견차가 크다"고 했다.

둘째날까지 NLL 문제에 부딪쳐 다른 의제는 손도 못댔다고 한다.

게다가 송전각 회담장에 걸린 김일성.김정일 부자 초상화를 남측 대표단이 문제삼으면서 첫날 회담이 30분 늦게 시작된 사실까지 뒤늦게 확인됐다.

김일철 부장은 둘쨋날 회의 때 "기자분들 있으니 한마디만 더하겠다"며 들으라는 듯 초상화 사건을 거론했다.

"우리가 남쪽에 가서 여기저기 간판에 영어 써져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냐"고 반문했다.

"서로 체제를 인정하기로 했으니 북측에 와서 (초상화를) 트집잡는 것은 잘못됐다"며 "실무자를 꾸짖었다"는 김 장관의 유감 표명으로 해프닝은 일단락됐다.

빈손으로 갈 것인가?

회담 3일째.

아침부터 평양이 분주하다는 소식이다.

남북 정상선언 이행을 위한 국방장관회담인데 빈 손으로 돌아올 수도 빈 손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잇단 실무접촉이 이뤄지고 합의서 내용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점심은 도시락, 저녁은 햄버거에 애꿎은 커피만 연신 들이키는데 타결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확인된 내용이라도 서명하기 전까지는 '알려졌다, 전해졌다'로 보도할 수밖에 없었다.

격언대로, 모든 것이 합의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합의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녁 7시 반.

8시 뉴스가 임박해서야 합의서가 나왔다.

북측은 문산-봉동간 열차 운행에 필요한 군사보장을 해줬고, 남측은 북한 민간선박의 해주항 직항에 필요한 군사보장을 해 주기로 했다.

육로가 열린 만큼 해로도 열렸다.

핵심 의제인 공동어로수역은 역시나 빠졌다.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을 설정하는 것이 절실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하'는 데 그쳤다.

국방장관회담보다 낮은 대화채널인 장성급회담으로 넘긴 것이었다.

수사는 그럴듯하지만 사실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망이었다.

남북의 정상이 서해평화협력 특별지대 설치에 합의하고 공동어로구역, 평화수역 설정을 남측 국방부 장관과 북측 인민무력부 부장간 회담에 위임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부활한 군사공동위원회

그나마 남북이 군사공동위원회를 가동하기로 한 것이 대표단의 체면을 살렸다.

군사공동위원회는 1991년 체결하고 이듬해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합의만 했을 뿐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15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합의서에는 남북의 상호관심사가 모두 포함돼 있다.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의 통보문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문제, 군 인사교류.정보교환 문제, 대량살상무기와 공격능력의 제거를 비롯한 단계적 군축실현 문제, 검증문제 등...

군사적 신뢰 구축은 남측의 주된 관심사여서 국방부는 줄곧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제의해 왔다.

물론 북측의 관심사도 명시돼 있다.

남북기본합의서 부속합의서 3장을 보자.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가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평양 국방장관회담에서 군사공동위원회 가동에 합의하면서 남측은 군사적 신뢰구축을, 북측은 해상불가침 경계선 문제를 협의.해결한다는 문구를 주목했을 것이고 이번 합의서에 재차 관철시켰다.


  제2차 남북 국방장관회담 합의서 2조

  1항 쌍방은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불가침경계선과 구역을
  철저히 준수하기로 하였다.

  2항 쌍방은 해상불가침경계선 문제와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하여
  협의.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동상이몽으로 먼지쌓인 남북기본합의서를 다시 꺼내들었다면 갈길은 첩첩산중이다.

이미 국방장관회담에 장성급회담, 군사실무회담까지 가동되고 있으니 차관급 군사공동위원회가 제도화돼 한 트랙을 더한들 실체적 접근에 실패한다면 군사공동위는 자칫 공동화될 수 있다.

폄훼하자는 뜻은 아니다.

서해의 격랑을 잠재우기 위해 선(線, line)이 아닌 면(面, zone)을 만들고 함께 고기잡이를 하자는 공동어로수역에도 합의를 못했으니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돌아온 김장수와 NLL, 그리고 '새로운 안보관'

"국민이 맡긴 소임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다시 카메라 앞에서 선 김 장관.

평양 국방장관 회담의 성과를 꼽으면서 '합의' '마련' '약속' '구축'했다고 자평했지만 한 가지 - 서해 평화보장 실천방안 - 만은 '강구'했다는 표현에 만족해야 했다.

"남북 간 견해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억지로 합의를 하는 것은 모양새가 오히려 좋지 않을 것이라"고 평양 회담 결과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경계선에 대한 인정문제는 "당연히 NLL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다음날.

노무현 대통령은 근본적인 문제를 던졌다.

안보관을 재검토하자는 것이다.

북한은 "더이상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한반도 뿐만 아니라 세계적 수준에서 안보관은 전면적으로 재검토돼야 한다"고 했다.

새로운 안보관에 의해서 한반도와 동북아를 바라보고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무역의 날에 설파한 안보관에는 2007 정상선언의 백미인 공동어로수역.평화수역에 합의하지 못한 냉혹한 현실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서려 있다.

'새로운 안보관'은 냉전종식 이후 이미 세계적 수준에서 재검토돼 왔다.

동북아 특히 '냉전의 섬' 한반도에만 그 빛이 미미할 뿐이다.

안보관(security perspective) 논의는 좀더 깊이있는 검토와 성찰을 요구한다.

내년 3차 국방장관 회담 때 남북 대군의 두 선장은 서해의 높은 파도를 얼마나 헤쳐나가 있을 것인가?

사흘낮 사흘밤 서울의 삼청동에 서서 평양의 송전각을 바라보며 '기대반 우려반'의 마음을 추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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