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비도 많고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8월도 다 지나고 여름도 이제 슬슬 작별을 고하고 있네요.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아프간 인질 전원 석방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함께 들려왔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여름이 가는 건 좋은데 그만큼 나이먹는 건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애들 쑥쑥 커가는 것도 왠지 부담스럽고...
이번 주에는 그동안 쎈 영화들에 밀리고 치였던 작은 영화들이 무려 11편이나 무더기로 선보입니다. 작은 영화라고는 하지만 개봉전후 벌이는 마케팅 비용과 규모가 작다는 것이지 영화들은 대작도 있고 저예산 독립영화도 있습니다. 특히 이번 주에는 출장중 비행기 안에서 챙겨봤던 영화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개인적으로 무척 흐뭇합니다. ㅋㅋ
디스터비아(12세 관람가)
블록버스터 [트랜스 포머]의 주인공으로 스필버그 감독이 팍팍 밀어주고 있어 할리우드에서 차세대 스타로 떠오르고 있는 샤이어 라보프가 나오는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영화 촬영과 미국 개봉은 [디스터비아]가 먼저였는데 국내 개봉은 순서가 바뀌었네요.
'대화가 필요한' 아버지와 흐뭇한 낚시 여행을 다녀오다 불의의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케일은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켜 경찰로부터 50일간 가택연금 조치를 당합니다. 센서가 부착된 감지장치를 발목에 24시간 차고 있어야 하는데 집주변 30미터 바깥으로 10초 이상 벗어나면 즉시 경찰이 출동하는 시스템입니다. (이 감지장치 사용료를 케일 엄마가 내야하더군요. 수익자 부담원칙이 아니라 사용자 부담 원칙... 신용카드도 된다더군요.) 요즘 애들 나가 놀라고 해도 잘 안나가듯 케일 역시 처음 며칠은 집안에 틀어박혀 학교도 안가고 비디오 게임과 케이블 채널 시청에 열을 올리는데 이를 괘씸하게 여긴 케일 엄마, 드디어 엑스박스 온라인 계정과 케이블 채널 모두 끊어 버립니다.
갑자기 할 일 없어진 케일, 이번에는 고성능 망원경으로 옆집들을 관찰하기 시작하는데 옆집 아저씨의 불륜, 수영하는 섹시한 여자 몸매 감상 등 새로운 쏠쏠한 재미를 발견해 캠코더까지 갖춰놓고 친구와 함께 본격 훔쳐보기에 탐닉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혼자 사는 건장한 중년남성이 사는 이웃 집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이웃 아저씨는 아무 혐의점이 없어 케일만 가택연금 때문에 정신적으로 맛이 간 학생으로 몰리게 됩니다.
엿보기의 심리를 적절히 활용한 히치콕 감독의 명작 [이창]을 리메이크 한 작품인데 활동적인 청소년이 주인공이고 요즘 넘쳐나는 첨단장비가 새롭게 등장합니다. 잘 짜여진 범죄 스릴러의 뼈대에 청춘영화의 풋풋한 매력을 합치고 캠코더, 웹캐스팅, 휴대폰 전송 등 젊은이들이 애용하는 장비들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케일의 친한 친구로 나오는 아론 유라는 배우가 한국계 미국인 즉, 재미교포 배우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매트릭스에서 네오의 연인으로 나왔던 캐리 앤 모스가 케일의 어머니로 나옵니다.
미스터 브룩스(18세 관람가)
일세를 풍미했던 완소남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역시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브룩스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자상한 가장, 또 자선 사업도 활발해 지역사회에서 뽑는 올해의 인물에 뽑힐 정도로 모범적인 시민입니다. 하지만 밤에는 악마의 영혼인 마샬(윌리엄 허트)의 지배를 받으며 완벽한 살인 행각을 저지르지만 절대로 잡히지 않는 연쇄 살인범입니다.
여기에 선머슴같은 유능한 여자 형사 앳우드(데미 무어)가 살인마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덤비는데 브룩스는 우연히 살인 장면을 목격한 약간 맛이 간 또라이 청년에게 발목이 잡히는 바람에 브룩스도 평소와 다르게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살인을 저지를때 무한한 쾌감을 느끼는 살인마의 이중성, 살인의 쾌감 내지는 ‘살의’라는 것이 난폭운전을 해놓고 뻔뻔하게 선량한 운전자를 오히려 위협하는 놈한테서도 느낄 수 있다는 식으로 전제합니다. 이 복잡한 서울 바닥에서 이리저리 치이면서 때때로 샘솟는 충동을 느낄때도 있는데 여기서는 그런 악마성을 윌리엄 허트라는 또다른 인물로 설정해 주인공이 끊임없이 대화하며 말다툼하며 농담까지 주고 받습니다. 영화 종반부 브룩스와 딸과의 끔찍한 시퀀스는 이런 악마성이 유전까지 되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케빈 코스트너, 윌리엄 허트의 관록있는 연기는 흠잡을데 없고 데미 무어의 거침없는 중성적 여성 연기가 영화에 잘 녹아들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 두 시간을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습니다.
퍼펙트 스트레인저(18세 관람가)
브루스 윌리스와 할리 베리가 나오는 스릴러 영화입니다. 폭로 전문기자 로위나(할리 베리)는 친구의 죽음을 조사하다가 성공한 광고회사 사장 해리슨 힐(브루스 윌리스)이 관련된 것을 알아내고 취재를 위해 힐의 회사에 위장 취업합니다. 힐은 처갓집 재산 덕에 벌떡 일어선 관계로 바람 피우다 아내에게 들키면 쪽박 차는 신세인지라 조신하게 살아야 하건만 들키면 황천간다는 점에서 더 짜릿함을 느끼는건지 온라인-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작업 걸어대고 바람 피워댑니다.
로위나의 동료인 마일즈도 중요한 인물인데 로위나는 마일즈를 둘도 없는 이성 친구로 생각하지만 마일즈는 순간순간 미모의 로위나에게 흑심을 품습니다. 범죄 스릴러의 기본 골격은 훌륭한데 어린 시절의 비밀과 중반에 드러나는 마일즈의 또다른 면모, 막판 충격적인 반전플러스 그것도 미진한지 여운을 남기려는 의도로 심어놓은 창문밖 엔딩 장면까지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려 '불도장' 먹고나서 걸쭉한 국물 때문에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의 우려가 다소 있습니다.
라파예트(15세 관람가)
[스파이더맨]의 살인 미소로 유명한 제임스 프랑코가 나오는 전쟁영화입니다. 1차 대전, 고립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않은 미국이 참전을 미루고 있는 가운데 몇 명의 미국 청년들은 갖가지 이유로 프랑스 공군에 자원입대해 라파예트 전투비행단을 창설하고 악의 무리 독일군들과 목숨을 건 공중전을 벌입니다. 첨단장비로 무장하고 초음속으로 날아다니는 최첨단 전투기가 아니라 단발 프로펠러에 육안으로 조준해 사격하는 복엽기로 가끔 탄알이 걸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원시적인 전투기이지만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풍부한 음향효과로 하늘에서 공중 전투가 박진감있게 펼쳐지고 땅에서는 우정과 동료애, 이국 여성과의 사랑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할리우드가 이전에 많이 만들었던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전쟁영화로 올드 팬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영화입니다. 고전적이지만 낡았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을 정도로 깔끔합니다.
영광의 날들(12세 관람가)
역시 전쟁 영화로 2차대전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등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유 수호를 명분으로 프랑스 군에 입대해 피를 흘린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강제징용, 학도병 등으로??에 섰던 우리 민족의 경험과 비슷하기도 하면서 사뭇 다른 것이어서 스탠스 잡기가 난감하더군요. 프랑스 군 내에서 본토인과 진급 뿐 아니라 쩨쩨하게 급식까지 차별하는 억울한 대우를 감수하며 싸웠지만 프랑스 정부가 이들에 대한 연금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사회 고발 메시지도 강하게 들어있습니다.
거친 녀석들(12세 관람가)
중년의 아버지들 4명이서 어느날 뜬금없이 바이크 여행을 떠나며 벌이는 갖가지 소동을 그린 코미디 영화로 생활에 치이고 위축되는 중년 남성들에게 다소의 위안을 주는 코믹 요소가 많은 로드 무비입니다.
브리치(15세 관람가)
촉망받는 젊은 청년 에릭이 FBI 내부의 일급 기밀을 적국에 팔아넘긴 혐의를 받고 있는 고위 간부 로버트 핸슨의 비서로 위장잠입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독실한 신앙과 확고한 철학을 가진 핸슨을 존경하기도 하면서 그의 비밀을 빼내는 조마조마한 임무를 해내야 하는 에릭은 혼돈을 느끼며 조직의 비정한 생리에 회의를 갖습니다. 첩보물이지만 화끈한 액션은 하나도 없고 크리스 쿠퍼, 라이언 필립이라는 중견배우와 젊은 배우의 연기 대결을 기본으로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따라가는 심리물에 가깝습니다. 특히 분열적인 자아를 선보이는 크리스 쿠퍼의 연기 카리스마가 돋보입니다.
탁재훈, 염정아 주연의 [내 생애 최악의 남자]는 관심이 많이 가는 영화인데 놓쳤습니다. 이밖에 한국영화로는 민병훈 감독의 인간 내면의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인 [괜찮아, 울지마]와 한승룡 감독의 [오프로드] 등 독립영화 등이 선보이고 요리사를 내세운 로맨스 드라마 [사랑의 레시피]등이 개봉됩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고 활기찬 한 주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