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이 내려진 10명은 이완용 등 1차 결정 대상자들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적극적인 친일반민족 행위자라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평가다.
환수 규모만 봐도 이완용, 송병준 등 1차 대상자들의 국가귀속 재산이 시가를 기준으로 했을 때 63억 원 상당(25만4천906㎡)이었던 반면 이번 2차 대상자들의 국가귀속 재산은 그 4배인 257억 원(102만60㎡)에 이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민영휘다.
갑신정변(1884년)과 동학농민운동(1894년) 진압에 공을 세웠던 민영휘는 한일합방 과정에서도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고 시종원경, 신사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민영휘는 일제로부터 받은 하사금과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거액의 재산을 모은 일제 시대의 대표적인 '매판자본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 따르면 민영휘는 한때 재산 규모가 4천만 원(현 시가 8천 억여원)까지 이르러 '고금 몇 백년 내에 처음 보는 큰 부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윤덕영도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민영휘 못지 않게 많은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윤덕영은 1930~1940년대 연간 11만 원(현 시가 17억여 원)의 소득을 올렸으며 본인은 물론 후손들까지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고 위원회는 전했다.
순정효황후의 숙부인 윤덕영은 황실의 외척이면서도 순종에게 한일합방 조약에 옥새를 찍도록 강요했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특히 윤덕영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중 무려 4개 조항에 해당하는 친일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친일재산 국가귀속 대상자 중 한일합방에 적극 앞장선 인물로는 민병석을 빼놓을 수 없다.
궁내부대신을 맡고 있던 민병석은 윤덕영 등과 함께 7일간 조석으로 고종을 만나 한일합방을 종용해 고종의 결단(?)을 이끌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민병석은 합방 이후에도 일제에 적극 협력하면서 중추원 고문과 부의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에 앞장선 이재곤 당시 학부대신과 임선준 당시 내부대신도 역시 이번 친일재산 환수 조치의 대상자가 됐다.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받고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민상호는 후손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줘 이번 2차 결정 대상자 중 가장 많은 시가 110억128만 원 상당의 토지(43만1천251㎡)를 환수 당할 처지에 놓였다.
중추원 참의, 황해도지사, 충북도지사 등을 지낸 박중양은 1919년 3.1운동 진압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한창수는 한일합병 이후 중추원 찬의와 고문 등을 지냈다.
또 한말 관료 출신인 이근상과 이근호는 한일합병에 공을 세운 대가로 일제로부터 각각 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위원회 관계자는 "1차 대상자는 우리가 잘 아는 거물급 친일행위자였던 반면 이번 2차 대상자들은 거물급은 아니지만 분명한 매국노라고 할 수 있다. 남아있는 재산은 이들이 거물급 친일파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