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사상 최악의 총기 참사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새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재미 동포들의 생활 토대가 얼마나 불안정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은 또한 이런 상황을 보도하는 언론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범인의 국적이 밝혀진 18일부터 19일까지 첫 이틀간의 보도에서 드러난 SBS 뉴스의 입장을 살펴봅니다.
총기 참사의 범인이 한국 국적의 조승희로 밝혀진 사실을 보도한 18일 SBS 아침종합뉴스는 이로 인해 주류사회로부터 보복이나, 따돌림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재미 동포사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뉴스는 재미 동포들이 미국인들의 보복 심리나 한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확산될 가능성이 많아 극도로 긴장하고 있으며, 그동안 한인사회가 쌓아 온 명성이 훼손되고 교민들의 경제 활동이 위축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뉴스는 조승희 씨가 8살 때 이민 가서 15년을 미국에서 거주한 영주권자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며, 그가 한국계라는 사실이 부각되어 인종적 문제로 번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외교부 관계자의 설명을 보도했습니다.
뉴스의 걱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미 FTA 타결로 그나마 분위기가 좋아졌던 한미 관계가 다시 걱정이라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한국 국적을 가진 한 영주권자의 범죄가 한미 관계에 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뉴스의 전제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날 저녁 8시뉴스는 교민을 상대로 하는 증오 범죄의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뉴스는 또 버지니아 공대에 다니던 한국인 학생들은 불안감 속에 속속 학교를 떠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18일 하루 동안 이 사건을 보도한 SBS 뉴스의 초점은 오로지 교민과 한미관계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한국계에 대한 미국사회의 태도가 실제로 어떤가를 전한 것은 대다수 미국인들이 한국 학생들에게 선입견을 갖지는 않는다는 짤막한 언급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보복과 따돌림을 두려워한 재미 동포들의 가위눌림과 이를 증폭시킨 한국 언론의 보도가 특정 개인의 범죄에 대해 온 국민이 죄책감을 갖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미국 쪽의 반응을 불러오기까지 했습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를 '집단적 죄의식'이라는 말로 부각시켰고, 18일치 '워싱턴포스트'는 참사가 일어난 "북 버지니아에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모든 한국인이 '너무 너무' 미안해한다."는 냉소적인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18일 8시뉴스는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이번 사건으로 인해 교민 사회와 한미 관계가 큰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미국인들의 기대 이상으로 성의를 표시해서 한국과 이 사건은 무관하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사건을 보는 SBS 뉴스의 입장은 19일 아침에야 조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날 아침종합뉴스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한인 사회에 책임을 묻거나 한인들이 지나친 죄의식을 갖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면서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기고한 교민 장태한 교수의 칼럼을 소개했습니다. 뉴스는 이 칼럼이 정부 관계자가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지나치게 사과 표현 등을 할 경우 자칫 한인 사회의 책임 논란을 불러 올 수 있는 만큼 언행에 신중을 기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의 영향력 있는 언론들은 사건이 터지자 바로 총기의 자유로운 판매를 가능하게 하는 미국의 법체계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유럽 언론들은 이 사건이 인종간의 문제가 아니라 허술한 총기규제와 다인종 사회 갈등 같은 미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습니다. 지구촌 각국은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미국의 총기 규제법안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SBS 뉴스는 이런 사실들을 보도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총기 소유와 다인종 사회의 갈등은 "그들이 그렇게 보도했다"가 아니라 SBS 뉴스가 스스로 지적해야 할 문제입니다.
바로 이 주제가 이번 사건을 보도한 SBS 뉴스의 초점이 되어야 하고, 본격적인 분석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조승희 씨가 강의실에서 총을 난사한 범행 직전에 미국의 NBC 방송에 보낸 편지와 동영상이 공개되자 19일 SBS 8시뉴스는 범행동기에 대한 경찰 수사가 치정문제가 아닌 사회에 대한 광적인 불만표출로 방향이 바뀌어 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의 글이 부자와 특권층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한 사실에 경찰이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날 뉴스는 또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범인의 국적이 아니라 범죄의 동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미국 사회는 대체로 이성적이고 차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이 미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얼마나 파헤칠 것인가는 그들의 문제입니다. 이번 사건의 후유증이 재미 동포들에게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는 성급히 예단할 일이 아닙니다. 한국의 언론을 허둥대게 만든 재미 동포들의 공포심에도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언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직은 현실화 되지 않은 위험에 대한 가위눌림에서 벗어나 사건의 핵심을 제대로 보도하는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