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이례적으로 개봉 영화 가운데 한국 영화가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해 평년보다 2-30% 많이 만들어져 과잉공급으로 수익률이 악화되면서 그 여파로 제작이 하반기부터 위축되더니 이제 슬슬 시장에서 그 징후들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여름만 해도 충무로에서 '요즘같은 호황기에 감독 데뷔 못하면 바보'라거나 '카메라만 확보하면 무조건 계약', 장비가 부족해 홍콩이나 일본에서 빌려오는 경우까지 생기더니 불과 2-3개월 만에 급속히 냉각됐습니다.
시장 상황도 밝지만은 않습니다. 극장가 가장 큰 대목 가운데 하나인 설 연휴가 올해는 주말과 겹쳐 짧기도 했지만 극장을 찾은 관객 수는 평소 주말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극장체인 CGV가 집계한 2월 전국 관객 수는 1월달보다 14.9%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위기의 전조인지 일시적 현상인지 영화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업계 사정은 이렇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국적 안가리고 좋은 영화, 재미있는 영화 많이 보면 됩니다.
스모킹 에이스
조 카나한 감독은 2002년 비밀마약경찰수사대를 다룬 [나크]를 통해 재능과 가능성 있는 젊은 감독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번 작품은 출연 배우들 면면만큼이나 화려하고 감각적인 업그레이드를 했다고 자부할만 하겠지만 [나크]에서 보여줬던 가능성 대신 주류시장 진입이라는 목표에 자신의 내공을 모두 쏟아내며 추파를 던지는 느낌입니다.
라스베가스의 카드마술사 이스라엘(제레미 피번)은 마피아와 모종의 거래를 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결국 증언을 댓가로 FBI의 증인보호프로그램에 들어가 호숫가 한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마약과 여자들에 둘러싸인 채 은신합니다. 마피아 보스는 괘씸한 이스라엘 의 목에 1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고 이 돈냄새를 맡은 난다 긴다 하는 킬러들이 모여듭니다.
신세대 감각에 맞춘 템포 빠른 편집과 시끄러운 펑크록 계열의 음악이 난무하는 핏빛 총격과 어우러지는 18세 등급의 액션 영화로 레이 리오타, 앤디 가르시아 같은 왕년의 스타는 물론 벤 애플렉이 허무하게 일찍 죽는 양아치로도 등장하는 등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합니다. 스킨헤드족 같은 무식한 3인조 킬러, 동성애를 연상시키는 듯한 흑인 여성 2인조 킬러(이 여성이 갖고 있는 저격용 소총의 위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합니다.), 볼따귀에 깊은 상처를 가진 변장이 특기인 킬러 등 다종 다양한 킬러들이 시시각각 호텔로 몰려들고 FBI 수사관들과 호텔 경비들이 킬러들과 또는 킬러들끼리 엘리베이터와 복도에서 서로 얼키고 설키며 피비린내나는 살육전이 벌어집니다. 이것들이 사람인지 좀비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킬러들의 죽음에 대한 방백과 독백은 ‘이 영화가 액션물이긴 하지만 이런 심각한 통찰도 담고 있거든’하는 정도로 여겨집니다. 다양한 킬러 10종 세트를 8천원에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뭔가 후련한 것을 찾는 분들이라면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루셔니스트
손은 눈보다 빠르다는 진리 아래 타짜들은 도박판의 질시를 받고 마술사들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몇 년전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마술사가 굵직굵직한 마술의 비법을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이제 마술의 시대는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또다시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우리 곁에 마술 열풍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퍼진 것 같습니다.
19세기 비엔나에 홀연히 나타난 아이젠하임(개봉영화 소개 기사 오디오 읽다가 이 이름에서 서너번 씹었습니다.)은 평범한 마술사들과 다른 고차원적인 새로운 마술로 '일루셔니스트'라는 호칭을 들으며 뜨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아이젠하임은 미천하고 가난한 가구제작자의 아들이었고 공작의 딸인 소피와 신분을 뛰어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다가 결국 헤어지는 아픔을 겪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피는 비엔나에서 황태자의 약혼녀로 아이젠하임과 다시 마주칩니다.
황태자는 소피와 정략결혼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급기야는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인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킬 계획까지 갖고 있는 야심가이자 모든 마법은 과학적으로 설명가능한 눈속임이라고 나름대로 똑똑한 척을 합니다. 여기에 미천한 신분을 뚫고 올라와 황태자의 충실한 심복으로 일하고 있는 경감은 아이젠하임과 소피의 불륜행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황태자에게 이 사실을 보고합니다. 질투심에 눈이 먼 황태자는 소피를 살해하고 권력의 힘으로 미제사건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에 낙담한 아이젠하임은 급기야는 죽은 사람의 영혼까지 불러와 어수선한 시국에 종교적인 추앙까지 받게 되고 죽은 소피의 영혼을 불러내 황태자가 의심스럽다는 암시까지 던지며 영화는 파국으로 향합니다.
마법과 사랑, 거기에 미스터리 스릴러까지 겸비해 두루 두루 영화적 재미를 갖췄습니다. 막판 반전까지 겸비하고 있는데 기발하고 산뜻한 반전이라기 보다는 반전을 위한 반전 같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의 힘에 의존한 주인공의 마술은 너무나 환상적이고 완벽해 그 매력이 떨어집니다. 등장하는 마술만 놓고 본다면 너무나 비현실적인 성격의 마술들이어서 그 비법이 뭘까를 평범한 사람들이 궁금하게 만들지조차 않습니다. 마술만 놓고 본다면 같은 마술을 소재로 한 [프레스티지]보다 신선도와 집중도가 떨어집니다. 하지만 '프레스티지'에는 없는 가련한 멜로와 권력 싸움에 수사물까지 양념으로 갖추고 있어 결국 결론을 내자면 우열을 가리기 힘듭니다.
이밖에 전편의 흥행에 힘입어 기대를 걸게 하는 [나비효과2]와 일본영화 [마미야 형제], [천년을 흐르는 사랑]등이 개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