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들은 앞서 소개해 드린 [1번가의 기적]과 [복면달호] 두 편이, 지난주 개봉한 [김관장...], [바람피기 좋은날]과 경쟁을 벌이는데 아카데미상 후보작 등 특색있는 외국영화들도 많습니다. 모처럼 푸짐한 식탁이 차려진 셈인데요. [록키 발보아]는 앞서 소개해드렸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가족과 함께 볼만한 의미있는 영화로 꼽을 만 합니다.
아버지의 깃발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니 일단 어느 정도 품질은 보증되는 셈이겠죠. 1945년 2차 대전 막바지에 가장 치열한 전투로 꼽히는 이오지마(유황도)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감독은 같은 소재로 하나는 미군과 미국의 입장으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군과 일본인의 시선으로 다뤄 나란히 선을 보였습니다. 아카데미 작품상에는 [이오지마...]가 후보로 올랐고 두 편의 영화를 같이 봐줘야 이 거장 감독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다고 하는데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겪은 우리나라에서 일본군을 피해자로 설정하는 [이오지마...]의 개봉은 불투명해 보입니다.
이오지마에 대대적으로 상륙한 미군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가장 높은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고지 정상에 성조기를 꼽는 사진 한 장이 본국으로 보내지자 전쟁에 지친 미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옵니다. 미국 정부는 이 기회를 이용해 그 자리에 있었던 병사 6명 가운데 살아있는 3명을 본국으로 불러와 대대적인 환영행사 겸 전쟁 기금 모금행사를 미 전역을 돌며 행하는데 병사들은 각각의 입장에서 전우들을 그리워하고 전장의 공포에 시달립니다.
엄청난 규모의 상륙작전과 대규모 전투장면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버금가는 시각과 청각의 스펙타클을 펼쳐 놓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는 전쟁의 비인간성과 그 속에 놓인 불쌍한 젊은 영혼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강조합니다.
더 퀸
엘리자베스 여왕을 연기한 헬렌 미렌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려놓은 점이 가장 특기할만 합니다. 남자도 아닌 60대의 여배우가 당당하게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은 폭넓은 연령층이 활동하고 그런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소비될 만큼 폭이 넓다는 이야기여서 부럽습니다.
1997년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신선한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총리에 당선되고 얼마안가 만인의 연인이었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파리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늘 며느리에 대해서 못마땅했던 여왕과 그 가족들은 일체의 언급을 삼간 채 침묵을 지키지만 다이애나에 대한 추모 열기는 들불처럼 번져갑니다. 처음에는 여왕과 왕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블레어 총리는 때로는 여왕과 대립하며 때로는 여왕을 설득하며 국민과 사이를 좁히려는 시도를 합니다.
영국 내의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시각도 있지만 21세기 최첨단 시대에 왕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면서 영국 국민들에게는 친숙하겠지만 우리에겐 얼굴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여왕과 왕실 세계 내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서거로 뜻하지 않게 왕위를 물려받고 50년 넘게 여왕자리를 꾸려온 엘리자베스 여왕의 입장에서 뿔이 화려한 신비로운 사슴같은 위상으로 비교합니다. 왕실 드라마면서 또한 여론의 변화와 이에 따른 소신 내지는 고집의 미묘한 줄다리기도 녹아 있어 정치드라마적인 요소도 들어있습니다.
여왕도 고독하고 힘들어하는 보통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데 이는 주름진 표정없는 얼굴만으로도 많은 것을 담아내는 헬렌 미렌의 연기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찰스 황태자는 실제보다 더 밥맛없는 이미지로 나옵니다.
쓰리 타임즈
허우샤오시엔 하면 우리나라의 임권택 내지는 김기덕, 홍상수 격으로 대만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입니다. 동양적 영상 미학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대만의 현실과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빼어나게 담아낸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 저는 [쓰리 타임즈] 빼고는 본 작품이 하나도 없네요. 40여 분에 달하는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일종의 옴니버스 영화로 1966년의 [연애몽], 1911년의 [자유몽], 2005년 [청춘몽]의 순서인데 서기와 장첸이 세 편에 나란히 남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이 가운데 [자유몽]은 대사가 안나오고 자막으로 나오는 일종의 무성영화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당구장에서 만난 남녀의 드러낼 듯 말듯한 사랑이야기를 다룬 1966년이 제일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장첸은 세계시장에 내놔도 경쟁력 있을 만큼 매력적이고 서기도 절제된 감정을 잘 표현합니다. 고정된 카메라, 롱테이크, 포커스의 이동 등 요즘 상업영화에서는 손님 떨어진다고 점점 사용빈도가 떨어지는 영화적 기법이 유감없이 발휘되면서 마치 깊고 그윽한 차향기나 종소리가 울려퍼지듯 잔잔하지만 깊은 공명을 하게 됩니다. 지루하기 그지 없는데 점점 보다보면 마력에 빠져들다가 서로 사랑한다, 보고싶다는 말한마디 하지 않고 나누는 대화도 별 의미없는 일상의 대화인데 여주인공의 웃음과 남자 주인공의 표정, 마지막 두 남녀가 수줍게 맞잡는 손의 클로즈업에서 사랑의 설렘을 압축해서 표현해 마력같은 감동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만 하구나 느꼈습니다.
이밖에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는 측은한 아이들이 판타지 세계와 교감하며 커나가는 성장영화인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와 미국 중산층의 불륜을 그린 [리틀 칠드런]이 개봉됩니다. 설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