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007 카지노 로얄'의 홍보를 위해 방한한 주요 출연진 및 감독과의 인터뷰를 위해 신라호텔을 찾은 기자들은 다소 생소하고 불쾌한 경험을 해야 했다.
이 영화의 배급을 맡은 할리우드 거대 배급사 소니픽쳐스는 이날 인터뷰를 신청한 한국 기자들에게 "감독·배우들에게 전편인 '007 어나더데이'와 관련한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국내 홍보대행사를 통해 전해왔다.
2002년 개봉한 '007 어나더데이'는 전 세계적인 흥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 시장에서만 흥행 참패를 했던 작품.
북한을 '악의 제국'으로 묘사하고 한국과 관련해서도 일부 왜곡된 내용을 담아 국내 관객의 외면을 자초했다.
소니픽쳐스의 요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주연배우인 대니얼 크레이그와의 원활한 인터뷰 진행을 위해 인터뷰 예정시간보다 20분 먼저 와서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인터뷰를 희망하는 언론매체의 기자는 사전에 자필 사인을 팩스로 보내달라는 요청도 했다.
이 모든 것이 국내 영화계 관행에서는 경험해본 적이 없는 할리우드식 행사진행 방식이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물어보니 '그쪽(할리우드)에서는 다 그렇게 한다더라'는 답변이 국내 홍보대행사를 통해 돌아왔다.
소니픽쳐스의 무리한 요구를 여과 없이 '중계방송'하는 홍보대행사의 태도도 문제지만 자칫 보도통제로까지 비쳐질 수 있는 상식 이하의 요구를 거리낌없이 다른 나라 기자들에게 하는 할리우드 거대 배급사의 오만한 태도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속담이 있다.
최근 '론스타 사태'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를 명분으로 내세운 서구 거대자본의 제국주의적 행보는 제3세계에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금융계에서 월가(街)의 거대자본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월스트리트 스탠더드' 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미화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계에서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할리우드 스탠더드'의 다른 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에는 세계화(Globalization)를 넘어선 지역화(Localization)가 지배적인 사조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한 기업이 다른 나라에서 장사를 하려면 그 나라 국민들의 니즈(needs)와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맞춰가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을 얕잡아보면서 지역화를 등한시하고 '우월한 자국방식'을 고집했던 월마트와 까르푸가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한국 시장에서 쫓기듯 철수했던 전철을 할리우드 거대 배급사들이 밟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