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올해도 한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한 해를 결산하고 정리하며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준비를 슬슬 시작해야 하겠네요. 올해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30% 늘어나는 바람에 개봉영화도 무척 많습니다. 개봉영화가 1주일에 보통 7-8편, 많게는 10편이 넘어버리는데 연말이 다가오니까 계속 매주 10여편씩 개봉될 예정이어서 머리로는 영화 제목이 헷갈리는 것은 둘째치고 이제는 이게 한국영화인지 외국영화인지도 헷갈립니다. 어릴적 할머니께서 스무 명 가까운 손주들 이름 헷갈려 잘못 부르시던 게 생각나네요.
이렇게 헷갈려서 바쁘고 피곤한 가운데 오늘 소개해드리는 이런 영화를 만나는 것은 무척 반갑고 행복한 일이라서 여러분들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나누고 싶어 이렇게 또 글을 띄웁니다.
다음달 14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비상]은 국내 최초의 스포츠 다큐멘터리로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 팀을 다루고 있습니다. 2004년 월드컵 열풍에 힘입어 시민구단으로 탄생한 이 팀이 창단 2년차에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기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시사회를 가면서 축구 매니아는 안되더라도 최소한 국가대표 경기나 프리미어리그 경기 정도는 챙겨보는 팬이나 볼만한 영화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고나서 이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절감하며 마치 모래 속에서 진주를 찾은 듯한 감격을 맛봤습니다.
영화의 첫머리는 색다른 앵글과 사이즈로 경기 장면, 선수들의 몸싸움, 움직임 등을 생생한 현장음과 함께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그 뒤 곧바로 나레이션과 함께 인천 유나이티드의 당시 현실을 보여줍니다. 시민들의 지지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출범했지만 어려운 재정형편 때문에 스타 선수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유일하게 남아있던 스타플레이어 최태욱마저 어려운 구단 재정 사정을 개선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일본 프로리그에 팔아넘깁니다.
창단 때 참여한 외국인 감독이 물러나며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한 장외룡 감독은 선수들과 첫 대면에서 ‘7승 3무 2패’라는 전기리그 목표를 제시합니다. 매일 지는게 일상인, 그래서 어떤 팀이라도 한번 이겨보는게 소원인 꼴찌팀 선수들은 어안이 벙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장 감독은 일본에서 배워온 정교한 시스템을 적용해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전략을 세워가고 또 선수들은 이런 지도에 자신들이 신기할 정도로 적응해가며 기적에 가까운 신화를 이뤄내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스포츠 다큐멘터리이지만 경기에서 어떻게 골을 넣고, 골을 먹고, 이겼고 졌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대신 단장부터 감독, 코치, 팀 닥터 등 개개 구성원의 일상과 사연에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합니다. 빵빵한 프로군단에서 촉망받는 지도자로 성장하다가 방출되는 아픔을 겪은 장외룡 감독은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역시 청춘을 바친 팀에서 인간적인 모멸까지 받아가며 버림받고 인천에 둥지를 튼 주장이자 수비수 임중용은 리그 후반 피로가 누적돼 실명 위기에 처하지만 이를 감추고 계속 경기에 나서는 무모할 정도의 투혼을 보입니다. 자신의 의지도 있지만 1군 선수가 15명에 불과해 적당한 교체선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작용합니다.
든든한 재벌 그룹이 구단주인 다른 팀들과 달리 이들은 전용 연습장도 없어 2시간 연습을 위해 왕복 4시간을 차로 이동하는 고생도 감수해야 합니다. 잦은 외박으로 유치원에 다니는 딸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김학철 선수, 아빠가 보낸 이메일을 읽으며 엉엉 우는 딸의 모습을 아내가 홈비디오로 찍은 화면에서는 [라디오스타]에서처럼 아이의 귀엽고 엉뚱한 모습에 웃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당하게 됩니다.
신인시절 촉망받는 선수였지만 이후 자만과 슬럼프에 빠졌던 서동원도 인천에 둥지를 틀면서 자신의 장기인 프리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연말 베스트 11에 뽑힌 시상식 자리에서 ‘이제 진정한 축구를 하게 됐다’는 의미있는 수상소감을 말합니다. 하지만 서동원도 아내가 아이 셋을 낳는 동안 한번도 출산 현장을 함께하지 못한 못난 남편이자 아빠입니다. 이렇게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일상과 이력을 담아나가면서 각각의 캐릭터들은 입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또 하나의 미덕은 경기장면입니다. 눈에 익숙한 스탠드에서 잡은 부감 앵글 위주인 중계화면 대신 그라운드 높이에서 바라보며 감독과 스탭, 또는 선수들에게 직접 마이크를 부착해서 따낸 몸끼리 부딪힐때 나는 ‘퍽’소리와 다치면서 선수들이 내는 ‘악’하는 단말마의 비명같은 생생한 현장음은 선수들과 감독에게는 단순한 축구경기가 아니라 정글에서 맹수들이 목숨 걸고 싸움을 하는 치열한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프로야구로 치면 전설의 팀 삼미 슈퍼스타즈처럼 K리그의 이질적인 인천 팀의 성공과 좌절 드라마는 영화가 끝날때 쯤이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어떤 극영화보다 더 사실적인 감동을 맛보며 더불어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극장문을 나서게 됩니다.
축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경기장과 연습장은 치열한 생존의 장이고 승패의 무게는 거실에 누워 캔맥주를 따며 중계를 보는 팬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온다는 사실, 평범한 사람들도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하는 각종 관문이나 시련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의 성패에 만족하거나 좌절하기보다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인생을 더 알차고 의미있게 사는 방법이라고 알려줍니다.
(** 앞으로 축구를 더 좋아하게 될 것 같고, 국가대표 경기든, 국내 프로팀 경기든 중계방송 보면서 실수를 하거나 똥볼 찰 때 욕은 가급적 줄이고, 멋진 플레이에 박수는 더 많이 쳐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인터넷을 뒤지다보니 영화의 주인공 격이자 주장인 임중용 선수가 곧 어여쁜 신부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도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