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카터 이후 레이건 공화당 정권에서 전쟁 재발
1979년 캠프 데이비드 회담 성공 이후 아랍권에서 사다트와 이집트를 배신자 취급하는 분위기가 퍼졌다. 이스라엘에서는 원래 우파이던 리쿠드당 베긴 수상의 입지가 약해졌다. 미국에서도 전쟁을 선호하는 세력의 불만이 거세졌다(미국에서 왜 전쟁을 원하는 세력이 득세하는지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살핀다). 카터가 중동에 평화를 가져왔지만, 그것을 항구적으로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든 과업인지 잘 보여준다. 또, 이후 역사 전개 과정은 현대 세계사에서 미국 대통령이 갖는 의미와 특정 대통령 재임시 표출되는 미국 외교의 특징을 정확히 들여다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1980년 미국 대선에서 평화보다 강공책을 주장하는 공화당의 극우주의자 레이건이 평화를 역설하던 현직 카터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됐다. 중동에 어두운 먹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1981년 1월말 대통령에 취임한 레이건 정부의 성격은 그가 처음 초청한 외국 정상이 누구인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민주주의를 뒤엎은 뒤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강제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유난히 늦겨울 추위가 심하던 1981년 2월 초 미국으로 가 극우의 맏형, 레이건을 만났던 것이다. 세계가 강경 국면으로 돌아가던 즈음 1981년 10월에 중동 평화의 주역이던 이집트의 사다트가 암살당했다. 이어 1982년 6월에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면서 중동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PLO 의장 아라파트는 이때 레바논 베이루트를 떠밀리 듯 떠나면서 중동정세 불안 요인의 핵으로 부상한다. 레이건 정권 8년 동안 중동에서 새로운 평화의 싹은 움트지 않았다.
2)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 1차 이라크 전쟁(걸프전)
2차례나 대통령을 역임한 레이건에 이어 다시 공화당의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레이건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그가 1989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1991년 전쟁의 무대는 이스라엘에서 이라크로 옮겨졌다. 이라크 1차 전쟁(걸프전)이다. 전쟁이란 결과물이 나오기까지는 강대국들이 저질러 놓은 문제가 뒷배경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후세인의 일방적인 침략으로 알고 있는 걸프전도 예외는 아니다. 전쟁을 바라보는 새로운 통찰력을 위해서도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다.
1918년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까지 아랍세계는 하나의 단일 사회였다. 622년 무하마드가 성스런 도망을 시작하면서 비잔틴 제국을 몰아내고 아랍에 단일 국가를 세운 뒤 유지해온 전통이다. 16c 이후 이민족인 오스만 투르크(터키의 전신)에 정복된 뒤에도 이집트가 19c 독립한 것 이외에는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18년 오스만 투르크가 1차 대전에서 독일과 함께 패전국이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승전국들은 하나의 단일 독립국가를 세워 주는 대신 분할 정책을 택했다. 엄청난 석유가 매장된 지역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계산이었다. 이라크 남부의 한 지방토후(土侯)였던 사바족이 쿠웨이트 왕가로 등장한 배경이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채 수 차례 합병을 꾀한 것은 마치 중국이 각 지역의 민족 자치구를 독립시키지 않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더욱이 쿠웨이트 왕가는 팍스 아메리카나 아래서 일방적으로 친미 정책을 펴며 나머지 아랍권국가들의 반발을 샀다. 유가상승을 노려 감산을 시도할 때 쿠웨이트 혼자 증산정책을 펴는 식이었다. 여기다 1980년부터 8년간 지리하게 끌며 이슬람권의 자체분열과 힘을 약화시킨 이란―이라크 전쟁 때 이라크 영토 근처에 유전을 개발해 이라크의 화를 돋궜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1990년 갈등을 빚던 쿠웨이트에 대해 "쿠웨이트의 원유 과잉공급으로 이라크가 140억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평화 회담이 결렬되고, 이라크는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해 당일로 쿠웨이트를 점령했다. 미국은 유엔을 통해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1991년 1월 15일 까지 철군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이라크가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43만명의 자국군을 포함해 33개국 68만명으로 다국적군(한국은 5억 달러의 전쟁 지원금과 의료진 200명을 보냄)을 구성해 이라크를 무너트렸다. 전쟁은 45일만에 끝났지만, 이라크는 42개 사단 중 무려 41개 사단이 궤멸되는등 정상적인 국가로서의 기능을 거의 잃었다. 더구나, 죄없는 시민을 포함해 최고 15만명이 숨졌고, 지금까지도 전쟁 후유증에 시달린다. 반면 다국적군의 피해는 126명에 불과했다.
3)클린턴 8년 평화와 아들 부시의 전쟁
바람잘 날 없이 전쟁이 꼬리를 물던 중동에 다시 평화가 찾아온 것은 1992년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인 우리나이 45살의 아칸소 주지사 클린턴이 현직 대통령인 부시를 누르고 당선 됐다. 세계 외교가에 화해 무드가 조성됐다. 클린턴이 1993년 1월 취임한 뒤 얼마 안지나 9월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상호 승인이라는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1988년 자치정부를 선포한 뒤에도 제구실을 못하던 팔레스타인은 지구촌의 큰형님 미국에 평화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이스라엘과 협상을 통해 자치를 실현할수 있었던 것이다. 카터 대통령 때 평화를 가져온 이집트의 사다트와 이스라엘의 베긴이 노벨 평화상을 탔듯이, 1994년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와 이스라엘의 페레스 외무장관, 라빈 총리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미국에 어떤 마인드를 가진 대통령이 나오느냐에 따라, 중동은 전쟁의 아수라장이 되느냐 평화의 축복받은 땅이 되느냐로 운명이 갈린다. 70년대 초 포드의 공화당 정권에서 전쟁을 치렀던 중동은 70년대 말 카터의 민주당 정권 때 평화를 찾고 노벨 평화상의 주인공이 됐다. 이후 80년대와 90년대 초 레이건과 부시의 공화당 정권 때 상황이 바뀌어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하고 미국은 걸프전쟁을 치렀다. 이어 90년대 중반 민주당의 클린턴 대통령 아래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평화를 일궈냈고, 노벨평화상을 탔다. 그러나, 2001년 공화당의 부시(아버지 부시의 아들)가 대통령이 되면서 중동은 다시 화마에 휩싸인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3년 이라크 전쟁.
아버지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할 때는 유엔과 국제사회의 동의라는 절차가 있었다. 그러나 아들 부시는 이라크를 침공할 때 그 절차가 없다. 그리고 2006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이란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 의지 천명... 중동뿐이 아니다. 1994년 북한 핵 위기때도 클린턴 정부는 전쟁 직전 상황까지 갔지만, 결국 클린턴이 카터의 중재를 받아들여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남북한 관계도 평화롭게 발전했다. 그러다, 부시가 등장하면서 다시 미국과 북한 관계도 남북관계도 난마처럼 꼬였다. 카터에 이어 클린턴이 다시 그리워지는 이유다.
재임기간에 많은 긴장을 큰 전쟁없이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는 클린턴?쁘게 받아들이는 자세로 살아간다고 한다. 그렇게 초탈한 경지에 이르러서인가. 기업체 로비하러 다니며 돈버는 공화당 부시대통령의 아버지 부시와 달리 그는 빈곤 퇴치 같은 자선활동에 이어 최근 환경 운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카터에 이어 또 하나의 인권과 평화 지킴이로 거듭나는 최강국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보여 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4)고르바초프가 보는 클린턴과 부시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체르넨코가 사망한 뒤 서기장에 선출돼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추진하여 소련 국내 민주화는 물론 동유럽의 민주화, 독일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20c 세계 평화의 주역 고르바쵸프 전 소련 대통령. 레이건에 이어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지구촌 문제를 양분하다 1991년 12월 권좌에서 물러난 그는 블룸버그 TV와 가진 인터뷰에서 클린턴이 "재임중 많은 난제를 맞이했지만, 총명하게 대처했다"고 조심스럽지만,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클린턴의 뒤를 이은 부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가 아버지 부시와 구별되는 정치인 이라면서 "주변에 그를 긴장 조성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비판했다.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던 동유럽 국가들이 실질적으로 독립해 민주주의를 이룰수 있도록 허용했던 그는 부시에게 "강대국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지 말라"면서 "리더십은 누구를 지배하거나 세계의 경찰이 돼 생기는 게 아니라 협력으로 얻게 되는 것"이라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의미있는 말을 남겼다. 부시는 이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