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
--일요일 새벽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죄없이 숨진 레바논의 34명 어린이의 명복을 빌며--
이스라엘은 주장한다. 평화롭게 살던 이스라엘 국민이 헤즈볼라의 포격으로 사망했다고. 이스라엘 병사가 납치 당했다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대한 살상과 파괴에 나섰다고... 테러리스트에 대한 자위권(自衛權) 차원이란 주장이다. 자국 국민이 희생당하는 상황에서 국가가 팔짱만 끼고 있다면 이는 국가의 존재이유가 무엇이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된다. 특정 지역 안에 모여 사는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구성원의 생존을 보장하는 의무는 국가의 권력과 간섭을 최소화 하자는 19c 야경국가(夜警國家)론에서도 필요성을 인정하는 범위다.
따라서, 폭력의 근원이라는 헤즈볼라에 경종을 울리고 다시는 테러를 자행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공격해 뿌리를 없애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이스라엘 정부의 주장과 이에 동조해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을 묵인하며 나아가 도와주는 미국의 입장은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인다. 깊이 따져 보지 않고 피상적으로 이들의 주장만 고려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자. 만약 국가가 국민의 생존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국가로서 존재의의를 상실한 것 아닌가.
고대 동양의 강고한 왕조시대에도 국민의 신의를 저버린 왕조는 하늘도 버린다는 논리가 성립됐다. B.C 1000년경 이미 은나라와 주나라 시대에 시작돼 맹자(孟子)가 춘추시대 정립한 역성혁명(易姓革命) 이론이다. 왕조를 바꾸는 일은 하늘의 뜻(天命)을 혁신하는 행위라 해서 혁명(革命)이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방벌(放伐)이라 해서 새로운 정권이 구정권을 무너뜨리는 방법, 선양(禪讓)이라고 해서 평화적으로 정권을 넘겨 받는 방법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는 935년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게 작위를 받으며 나라를 넘겼고(선양의 방식), 1392년 이성계는 고려왕조를 시해하면서(방벌의 방식) 조선을 열었다.
이스라엘로 방향을 돌려 레바논(레바논내의 헤즈볼라)을 공격한 뒤 이스라엘 국민들의 생명이 더 안전해 졌는지 따져 보자. 그랬다면 적어도 이스라엘은 레바논이나 세계 시민들로부터는 침략자, 파괴자라는 비난을 들을 수 있어도, 자국 국민들로부터는 보호자, 수호자라는 평가를 얻어야 정당하다. 지난 6월 25일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전사가 이스라엘 군을 납치하자 이스라엘은 가자의 팔레스타인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감행했다. 7월 12일 레바논에 본부를 둔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병사 2명을 죽이고 7명에 부상을 입히자 레바논에 전면전 수준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후 이스라엘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 수가 크게 늘었다. 젊은이들은 전장의 공포속으로 내몰린다.
박해받던 유대인 이젠 팔레스타인 박해
결국 팔레스타인 전사와 헤즈볼라의 1회성 테러에 대해 무차별 공격 말고 다른 해결책을 모색했더라면 자국민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국민들은 국민을 죽음의 사지로 몰고 가는 강공책의 정부, 역성혁명감인 정부를 지지한다. 무엇을 지켜주길래 그러는지 이유가 궁금해진다. 이스라엘 북부, 레바논 접경 하이파 근처 나하리야(Nahariya) 출신의 영국 사우스 햄프턴 대학 교수 오렌 벤도르(Oren Bendor)가 인디펜던트지에서 주장한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은 이스라엘 국민의 보호가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자체일 뿐"이라고 예리하게 진단한다. 여기서 답이 엿보인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권위와 정통성을 역사적으로 들여다 보자. 아담과 이브의 자손으로 하느님이 내린 대홍수의 심판에서도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 아브라함의 피를 잇는다는 유대민족은 고대 이집트 왕국에 끌려갔다가, 모세의 영도로 팔레스타인에 돌아왔다. 이후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 다윗이 나라를 세우지만, 그만 자체 분열에다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멸망당해 대부분 바빌론의 노예로 끌려가고 만다. 당시까지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던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유대민족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내 줬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지배로 들어갔고, 마침내 2c 로마에 의해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서 강제 추방됐다. 유대인은 중세 내내 유럽 각국에 흩어져 살았지만, 예수님을 고발한 원죄에다 성경이 부정적으로 그리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 미움을 샀다.
그러다, 19c말 이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민족주의 열풍을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 펼쳐졌다. 그 와중에 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찌 독일에 의해 인종청소의 피해를 겪었다. 이후 박해받는 희생자의 이미지로 그려진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을 떠난지 천 800년 만인 1948년 미국의 도움 아래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아랍 원주민이다. 인종 청소의 희생양이었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계획적이고도 교묘한 방법으로 내쫓은 것이다. 갈 곳 잃고 떠돌이가 된 사람들이 오늘날 팔레스타인 난민이다. 그 가운데 난민 못해 먹겠으니 죽어도 좋으니까 싸우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과격파 팔레스타인 단체 전사들이다. 그리고, 이런 형제들 모습 눈뜨고 못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헤즈볼라를 비롯한 아랍국가들의 과격 단체들이다.
폭력을 유발해 테러분자 만든 뒤 더 큰 폭력 행사
그런데, 양측의 다툼에서 묘한 일이 벌어졌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땅을 내준 것도 억울한데 졸지에 테러분자로 낙인찍힌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일까. 이스라엘이 [잔인한 테러]와 [자위권적 보복]이라는 상반된 개념으로 선전전에 성공한 것이다. 끝없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열악한 상황으로 몰아 넣어 이들을 잔인한 테러분자로 만든다. 이어, 자신은 테러를 잠재워 생존권을 지킨다는 명분아래 압도적인 힘으로 팔레스타인과 주변 아랍세력을 요리해 나간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빈약한 정통성은 어느덧 세인들의 관심권 밖이다. 남은 것은 테러와 대(對)테러 작전.
이스라엘은 모든 아랍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군사력을 능가하는 엄청난 군사력(아랍을 잿더미로 만들 핵무기 포함)을 보유한 세계적인 군사강국이다. 여기다 언제든 자신을 지원할 진정한 맹방이자 지구촌 누구의 통제로부터도 자유로운 리바이어던(Leviathan) 미국을 곁에 두고 있다. 맹방이란 미국-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보듯이 서로 평등한 주권을 인정하며 어느 한쪽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무조건 믿고, 지원하는 관계를 말한다. 이런 자신감을 기반으로 이스라엘은 중동 사태를 일시적인 진퇴(進退)를 떠나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할 수 있다. 앞으로도 팔레스타인 전사나 헤즈볼라에게 당하는 소수의 희생자가 이스라엘 안에 반드시 생겨난다. 이스라엘은 고의든 결과적이든 꼭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낼 것이다. 국가설립의 빈약한 정통성과 팔레스타인 박해의 진상을 감추면서 하느님에게 보호받는 선민국가 이스라엘을 유지하는 전제조건이다. 내부적으로 국민의 역성혁명도 막고 외부의 비난도 피해가는 안전장치다.
누가 진정 폭력을 키우는 나라인가. 종교적으로 유대교를 신봉하지 않거나, 민족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사람의 고통 위에 유대인의 생존권을 지켜 나가는 이스라엘의 정통성과 권위. 정교분리와 다민족 복합 사회가 세계적인 추세인 가운데 이런 원시적(primodial)이면서 문명 이전의(pre-cultivated) 가치관, 그러니까 B.C 10c 사막 유목민들이 고안해낸 민족과 국가, 종교관의 권위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 한 사람 죽이면 살인자이지만 수백 수천 명을 죽이면 난세의 영웅이 된다. 이스라엘은 지금 몇 사람 희생 위에 팔레스타인 아랍은 테러리스트로 만들면서 자신은 핍박을 이겨내는 순교자적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