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한국 공연이 개막됐습니다. 1989년 런던에서 초연된 작품이니, 17년만입니다. ‘뮤지컬 빅 4’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한국에 선보인 ‘미스 사이공’. 영국 출장길에 봤던 공연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다시 보면서 명성은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한국 공연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두서없지만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 나름의 감상입니다.
음악이 압권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사랑의 테마는 킴과 크리스가 함께 부르는 ‘해와 달(Sun and moon)’이다. 킴은 달이요, 크리스는 해다. 두 사람은 ‘하늘에서 다시 만나자’고 노래하며 사랑의 희열에 젖는다. 필사적이리만큼 끊임없이 키스하며 서로를 욕망한다. 이들의 '필사적인' 사랑은 절망적인 상황과 대비돼 더욱 도드라진다. (사실 ‘해와 달’은 한 하늘에 오래 함께 떠 있기 어렵다. 제목부터 두 사람의 사랑은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두 사람이 부르는 ‘해와 달’의 멜로디는 곧바로 영혼에 새겨진다. 아름답다, 정말. 노래가 오랫동안 지속되길 바랐다.
내가 ‘미스 사이공’의 명성이 헛되지 않았다고 한 것은 절반 이상 음악의 공로다. ‘해와 달’ 외에도 ‘내 마음 속의 영화(The movie in my mind)’, '난 아직도 믿죠(I still believe)’, '세상의 마지막 밤(The last night of the world)', '신이시여 왜(Why God why)', ‘널 위해 날 바치겠어(I'd give my life for you)' 처럼 주옥같은 선율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미스 사이공의 음악은 단순히 멜로디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적절한 부분에서 절묘하게 변주되고, 반복되며, 등장인물의 심리와 앞으로 발생할 사건을 암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주 치밀하게 짜인 구성이다. 공연이 끝날 무렵이면 중요한 주제 선율들은 어느새 머릿속에 메아리치게 된다. 작곡가 미셀 쇤버그의 실력은 이미 ‘레미제라블’에서 확인한 바 있다. 대단하다.
헬기 장면
해외에서 ‘미스 사이공’을 본 많은 사람들이 ‘야! 무대에 진짜 헬기가 뜬다니까!’ 했다. 어쩌면 헬기 장면은 일단 엄청난 물량 공세로 관객들의 ‘기를 죽이는’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어찌 됐든 ‘미스 사이공’의 상징처럼 돼 버린 이 장면을 영상으로 처리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오리지널 공연의 실물 모형 헬리콥터 장면은 보지 못해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입체 영상으로 처리한 헬기 장면,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실감 난다.
철수를 앞둔 미국 대사관 앞, ‘미국행’을 꿈꾸는 베트남인들의 절규와 마지막 철수 작전을 이행해야 하는 미군의 긴박감이 교차된다. 킴과 크리스는 만날 듯 만날 듯 결국 만나지 못한다. 바리케이드 이쪽과 저쪽--미군 쪽과 베트남인 쪽을 번갈아 보여주는 연출은 아주 훌륭하다.
아수라장의 한 가운데 서서, ‘나는 아직도 믿죠(I still believe)’의 멜로디로 크리스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노래하는 킴. 어디선가 헬기가 다가오는 소리에 커지는 눈동자. 믿기 힘든 현실에 맞닥뜨리는 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헬기의 소음이 가까워지면서 입체 영상이 마치 진짜 헬기처럼 미국 대사관 담 안쪽에 ‘착륙’한다. 차마 발을 떼지 못하는 크리스까지, 모든 병사들이 이 헬기에 올라탄다. 탈출이다! 떠나가는 헬기의 굉음은 무대에서 시작해 객석을 훑고 지나간다.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던 베트남 인들은 뒤돌아 헬기가 사라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본다. 절규와 통곡이 이어진다.
(병사들이 헬기를 ‘올라타는’ 장면은, 사실 배우들이, 영상에서 헬기 문으로 연출되는 공간을 향해 ‘내려가는’ 것이다. 객석의 위치에 따라서는, 배우들이 내려서는 티가 뚜렷해 보이기도 한다. 보완이 필요할 것 같다.)
킴과 크리스
국내 무대에 처음 데뷔하는 재미교포 마이클 리는 브로드웨이에서 투이 역으로 이미 ‘미스 사이공’ 무대에 섰던 경력이 있다. 아마 마이클 리의 캐스팅에는 이런 경력도 고려됐을 것이다. 스탠포드 의대를 다니며 의사를 지망하다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개인사도 흥미롭다. 준수한 외모에 가창력도 훌륭하다. 그를 인터뷰할 때, 비록 짧은 답변이었지만, 캐릭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 흔적도 보였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과 대비되는 미군 병사로서의 존재감이 더 드러나도록 체격이 좀 더 컸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든다. 제일 아쉬운 것은 한국어 발음 문제다.
노래할 때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빠른 속도로 가사를 소화해야 하는 경우, 또는 몇 안 되는 대사를 할 때, 어눌한 발음이 귀에 걸린다. 공연 초기이니 앞으로 더 나아질 것으로 믿어본다.
(가사 전달의 문제는 마이클 리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특히 합창의 노래 가사는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다. 미리 공연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고 보는 사람이라면 많이 답답할 것 같다. 공연장 음향이나 우리말 가사 번역에서 개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내가 공연을 본 것이 열흘 전쯤이니, 지금쯤 음향 밸런스 같은 문제는 좀 개선됐을 수도 있다.)
다른 배역들
엔지니어는 코믹하면서도 비애를 자아내는 인물이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얼마든지 탐욕스럽고 간사하고 비굴할 수 있는 엔지니어. 결코 선한 역할은 아니지만 밉지 않다. 사실상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뇌출혈로 쓰러진 김성기 대신 엔지니어를 연기한 류창우는 연습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을 터인데, 비교적 안정된 연기를 보여줬다. 피날레, 무대 조명이 점점 꺼져갈 즈음, 어머니를 잃은 킴의 아들 탐이 엘렌에게 안겨 집을 떠날 때 엔지니어는 일행을 따라가려다 저지당하는데, 류창우가 그 순간 어떤 표정을 짓는지 너무 궁금했다. 류창우는 무대 인사에서 마이클 리와 김보경에 이어 맨 마지막으로 등장해 큰 박수를 받았다.
존을 연기한 이건명은 믿음을 갖게 하는 배우다. 존은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역할이다. 사이공 함락 직전, ‘드림 랜드’에서 무섭게 향락에 탐닉하던 존은 고향에 돌아와서는 미군의 과오를 직시하고 혼혈아들을 돌보는 부이도이 재단을 설립한다. 이건명은 어쩌면 지나치게 극적으로까지 보이는 캐릭터의 변화를, 무리 없이 소화했다.
(덧붙이자면, 영국에서 공연을 봤을 때는 존의 캐릭터 변화가 너무 드라마틱한 것이 어색해 보였다. 1막에서 ‘드림랜드’의 댄서들과 그렇게도 잘 ‘놀아나던’ 존은, 2막에서는 아주 ‘진지한’ 인간형으로 변신한다. 양아치 같았던 사람이 부이도이 재단의 설립자? 잘 수긍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영국인 연출가 로렌스 코너는 대사관에서 가장 먼저 미군 철수를 알았던 정보 담당 존이 과중한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질펀한 향락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부이도이 재단을 설립한 것이 존의 본 모습이라고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이라는 상처에 어떤 사람은 정신병으로, 어떤 사람은 격렬한 반전 시위로, 어떤 사람은 고립으로 대응하는데, 존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상처에 대응했다는 것이다.)
나는 킴의 정혼자 투이라는 인물에 애정이 많이 간다. 투이는 등장하는 장면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워낙 긴박하고 극적인 장면들이라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하지원의 투이는 무난했다. 조금 더 강한 에너지를 드러내면 좋겠다. 엘렌 역의 김선영은 워낙 칭찬이 많아서 기대했었는데, 내가 본 날은 건강상 문제로 출연하지 못했다.
한국인에 각별하다?
베트남인들이 킴에게 ‘양갈보’라고 욕하고, 킴의 아들은 ‘미군의 사생아’라고 손가락질하는 장면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엔지니어가(어쩌면 킴까지도) 끝까지 붙들고 사는 ‘아메리칸 드림’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부이도이’ 장면에서는 이 땅의 수많은 혼혈아들을 떠올렸다. ‘미스 사이공’의 ‘각별함’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미군 주둔의 역사, 그리고 '라이따이한'을 낳은 베트남 참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에겐 '양날'이다.
서양의 시각에서 그려낸 아시아를 만나는 일은, 뭔가 개운하지 않을 때가 많다. 미스 사이공도 마찬가지다. ‘나비 부인’이나 ‘투란도트’ 같은 오페라를 볼 때도 그랬다. 이상하게도 영국에서 외국인들끼리 공연하는 ‘미스 사이공’을 봤을 때는 이런 느낌이 지금보다 덜했다. 외국에서는 킴은 보통 아시아계 배우가 연기하고, 크리스는 백인이 연기한다.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고 피해자인 킴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따라가면 됐었다. 그런데 한국인들끼리, 한국어로 연기하는 것을 보니, 전혀 느낌이 다르다.
삐딱하게 보자면 얼마든지 삐딱할 수 있다. 킴은 과연 자신을 돈으로 산 크리스를 진정으로 사랑했을까? 하룻밤 사랑의 힘이 그렇게 강했을까? 킴의 사랑은 어쩌면 ‘집착’ 아니었을까? 지옥 같은 현실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미국인 크리스’에 대한 집착. 구원에 대한 열망. 미국은 구원의 땅인가? 킴이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아들을 아버지에게 보내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인가?
세계 4대 뮤지컬
‘미스 사이공’이 ‘캣츠’와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과 함께 ‘세계 4대 뮤지컬’이라는 게 마치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는 요즘이다. 이 네 뮤지컬은 모두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지고 미국을 거치면서 이전에 없었던 세계적 인기를 누렸던 작품들이다. 당시 뮤지컬 산업의 흐름을 많이 바꿔놓은 대작들이라 ‘뮤지컬 빅 4’로 거론됐고, 이것이 한국에서는 ‘4대 뮤지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뮤지컬 빅 4’를 곧 ‘뮤지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네 작품’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뮤지컬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수작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개인적으로는 ‘레미제라블’이나 ‘오페라의 유령’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미스 사이공’ 역시다.
뮤지컬 마니아라면 다른 작품과 비교할 수 있는 ‘미스 사이공’의 한국 초연을 놓칠 수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필수 과목’이라고 할까. 뮤지컬 초보자에게도 워낙 유명해서 궁금한 작품일 터이고.
8세 이상 입장가?
8세 이상 입장가라고 해도 여덟 살짜리 내 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지극히 사실적으로, 질펀하게 그려진 사이공과 방콕의 유흥가 장면들은 성인용이다. 그런 장면들이 아니더라도 어린이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내용이다. 그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하고 보여줄 일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적어도 고등학생 이상은 돼야 소화할 수 있을 듯하다. 주변에 초등학생 다니는 자녀들과 함께 보겠다는 분이 계셔서, 웬만하면 좀 더 크면 보여주시라고,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