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중해 문명기 5권--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
(Art of Mosaic and Greco-Romai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2장. 테세라 모자이크의 세계
7. 독일
1)독일
2,3,4,5,6,7,8) 쾰른(Cologne) --오늘 이야기
9,10,11,12,13)베를린(Berlin)
2) 고대 쾰른(Cologne)의 역사
로마인들이 처음 독일땅 라인강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카이사르때다. B.C 58년 원로원에서 골(갈리아, 알프스 북쪽 프랑스와 스위스, 벨기에 독일 남부) 총독으로 임명된 카이사르는 B.C 53년 라인강으로 진출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라인강을 국경선으로 삼고 라인강 이남을 로마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B.C 38년 실권자 옥타비아누스의 절친한 동지 아그리파가 골의 군사 책임자가 됐다. 라인강 국경선 수호가 주임무여서 라인강 국경선이 로마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아그리파는 이때 라인강가에 오피둠 우비오룸(Oppidum Ubiorum)이라는 기지를 건설했다. 오늘날 쾰른이라 부르는 도시의 출발이다. 그는 B.C 19년 다시 골 책임자가 되는 등 쾰른과는 깊은 인연을 맺는다.
B.C 16년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직접 라인강에 와 라인강을 따라 북해까지 강변에 50개 이상의 보루를 만들었다. B.C 13년 옥타비아누스는 아끼던 양아들(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두 아들 가운데 한명) 드루수스를 골 책임자로 보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라인강을 넘어 엘베강까지 북쪽으로 원정을 감행하는 등 로마의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그가 제명을 못살고 요절 한 뒤 곡절 끝에 A.D 7년 바루스가 골 책임자로 나왔다. 그러나, 로마에게는 치명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루스의 군대가 A.D 9년 아르미니 족의 공격을 받고 2만명 전원이 전멸 당한 것이다. 그러자, 옥타비아누스는 13년 죽은 드루수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를 골 책임자로 삼아 라인강으로 내보냈다. 그는 라인강변 게르마니아를 상,하 두지역으로 나누고, 오피둠 우비오룸을 중심지로 삼았다.
1년 뒤인 14년 옥타비아누스가 죽고, 드루수스의 형 티베리우스가 2대 황제가 됐다. 조카이자 양아들 게르마니쿠스는 혼란기의 게르마니아 반란을 진압하고, 오늘날까지 건물의 기초가 일부 남아있는 관저(Praetorium)를 신축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이곳에서 아그리파의 딸 大아그리피나(어머니는 옥타비아누스의 딸 율리아)와 사이에 아들 칼리굴라와 딸 小아그리피나(로마시대 딸은 어머니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小아그리피나는 아그리피나로 적음)를 낳았다. 아그리피나가 태어난 것은 15년이었다. 37년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 황제 자리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칼리굴라에게 넘어갔고, 칼리굴라가 암살당한 뒤에는 삼촌 클라우디우스가 41년 4대황제가 됐다.
클라우디우스는 조카 아그리피나와 결혼했다. 아그리?오룸에 도시이름을 지을 것을 부탁했다. 몸도 불구였고, 또 아내 하자는 대로 따랐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이름을 지어줬다. 처(妻)에게 잡혀 살면 처가집 말뚝에도 절하는 법.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아라 아그리피넨지움(CCAA, Colonia Claudia Ara Agrippinensium)은 그렇게 생겨났다. 아그리피나의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아그리파 장군이 건설한 오피둠 우비오룸이 외손녀 때 쾰른이 된 것이다. 고향사랑이 끔찍했던 한 여인 덕에 쾰른이란 이름이 생겨났으니 독일 사람들은 이 로마 여인에게 고마워 해야 하고... 이번 월드컵 4강전서 이탈리아에 패했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다. 특히, 쾰른 사람들은... 도시를 만든 아그리파 장군과 이름을 만들어 준 쾰른 태생의 외손녀 아그리피나를 생각한다면...
그러나, 폭군 칼리굴라는 암살 당하고, 아그리피나는 자식인 네로에게 죽임을 당했다. 네로는 강제 자실로 생을 마감했다. 고향땅의 운세가 좋지 않았다기보다 독재자 잡안의 권력다툼이란 게 흔히 그런 면모를 보인다. 자식도, 부모도 ,형제도 없는... 동서고금에 예외가 없다. 네로를 끝으로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피를 이은) 가문은 막을 내렸다. 68년 네로가 죽은 뒤 황제자리를 놓고 4명이 서로 황제라고 주장하며 나섰다. 이베리아 반도 에스파니아에서 갈바, 로마에서는 오토, 알렉산드리아에서 베스파시아누스, 그리고 쾰른에서도 한명 나섰다. 비텔리우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쾰른에서는 게르만족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그러나 곧 진압됐으며 98년 트라야누스가 쾰른에서 군대를 지휘하다 네르바 황제의 뒤를 이어 로마에서 황제자리에 올랐다. 이래저래 쾰른은 로마황제와 연(緣)이 많다. 이후 쾰른은 게르만족과 큰 다툼없이 공존하며 평화와 번영을 누린 것으로 보인다.
284년 디오클레티누스 황제때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자행됐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독교 신자 군인들이 숙청당했다. 그러나 곧 세상이 바뀐다. 브리타니아(영국)에서 일어나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314년 쾰른에도 오늘날 대성당 자리에 성당이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로마군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세상살이가 이렇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으면서 동서로마가 갈렸다. 로마제국의 명이 다해가는 순간이었다. 날로 세력이 위축된 서로마 제국. 로마에서 옮겨간 수도 라벤나를 지키기 위해 401년 스틸리코 장군이 라인강 유역 군대를 빼내가면서 라인강 유역이 로마인의 손에서 게르만족의 일파 프랑크족 손으로 넘어갔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보다 훨씬 앞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