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중해 문명기 5권--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
(Art of Mosaic and Greco-Romai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2장. 테세라 모자이크의 세계
6.영국
1)영국
2,3,4,5,6,7,8,9)런던(London)--오늘 이야기
10)배스(Bath)
6.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British Museum)
1. 서쪽 계단(West Stairs) 좌측 벽면 2-3
연못(Fonte)과 물병(Vase).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 ⓒ김문환
대저택에서 나온 작품 말고, 5개의 작품이 추가로 좌측 벽면에 전시돼 있다. 먼저, 꽃병이나 물병(Vase)을 연못 분수(Fonte, 그림 상단 오른쪽과 가운데 꽃병 사이에 라틴어로 표시) 옆에 그려 넣고, 주변에 새나 사슴 같은 생명체를 표현했다. 기독교 시대 보던 전형적인 모자이크 소재다. 신의 창조물인 자연을 그리는 기법이 발달한 탓이다. 이 모자이크는 카르타고에서 4-5c경 제작됐다.
꽃과 식물을 소재로한 카페트 스타일 모자이크. 초기 북아프리카 양식의 특징이다.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 ⓒ김문환
꽃무늬 작품도 눈길을 끈다. 이유는? 마치 요즘 서양식 주택의 거실을 수놓는 카페트(carpet)를 닮았기 때문이다. 2-3c 카르타고에서 제작된 모자이크인데, 여기에 도입된 카페트 스타일 모자이크는 초기 북아프리카 모자이크의 전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다. 지중해 주변에 널리 자생하는 아칸투스 잎이나 장미꽃 같은 [꽃과 식물] 소재의 카펫트식 모자이크. 이런 스타일은 사실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된 흑백 모자이크에서 먼저 사용됐다. 테세라 모자이크가 시작된 그리스 문명권에서는 컬러 테세라 모자이크가 널리 유행했지만, 그리스 문화를 이은 로마는 달랐다. 검은 색과 흰색 돌만 사용하는 흑백 모자이크를 독특하게 발전시켰고, 로마제국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나 이베리아 반도, 영국 등으로 퍼져 나갔다. 흑백 모자이크는 재료 뿐 아니라 표현 소재와 표현 기법. 즉, 기하학 무늬나 꽃을 카펫트 형식으로 표현하는 양식도 낳았다. 그 결과물이 경제적으로 번영하던 북아프리카에서 만들어진 카페트식 컬러 테세라 모자이크다.
담쟁이 덩굴 잎.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 ⓒ김문환
담쟁이 덩굴 잎(ivy leave)을 그린 2-3c 흑백 모자이크 한점도 탐방객을 반갑게 맞는다. 흑백 모자이크는 앞서 설명했듯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돼 지중해 각지로 퍼진 양식이다. 3c 카르타고에서 만든 무늬 모자이크도 선보인다. 붉은 색 삼각형(triangle)을 이어 붙여 테두리로 삼고, 그 안에 작게 체인(chain) 무늬의 테두리를 만들었다. 그 안쪽으로는 다시 물마루(crest, 말결이나 파도의 마루터기, 즉 꼭대기) 무늬를 연속적으로 그렸다. 맨 안쪽에는 기하학적으로 배치한 꽃무늬를 넣었다.
삼각형, 체인, 물마루, 기하학 무늬 모자이크.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 ⓒ김문환
여기서 카르타고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만든 3차 포에니 전쟁에 대해 말을 이어보자. 패전국 카르타고에 주어진 운명은 가혹했다.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고, 해상 무역대국의 기반이던 선박도 대부분 로마에 빼앗겼다. 로마의 허락이 없이는 외국과 전쟁할 수도 없었다. 로마에 복속된 3류 국가로 전락. 그런데도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카토 같은 이는 카르타고를 멸망시키자고 주장한 대표적인 인사다. 이유는? B.C 174년 카르타고와 마시니시(市) 사이 분쟁을 조사하기 위해 카르타고에 갔던 카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전쟁 패배 30여년을 지나면서 비옥한 북아프리카 특유의 곡창지대를 발판 삼아 카르타고가 서서히 번영을 되찾고 있었던 것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로마를 초토화시키며 멸망 일보 직전으로 몰고 갔던 카르타고의 지난날 위상을 떠올리며 두려워했을 게 틀림없다.
당초 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명장 스키피오는 카르타고를 존속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카르타고가 있어야 로마가 게을러지지 않고, 자만심에 빠져 위기를 자초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이런 스키피오의 주장이 혜안이었을까? 그러나, 역사는 카토의 주장대로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는 길로 흘러갔다. 로마는 B.C 149년 제 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 1차전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갈등, 2차전은 패배를 앙갚음하기 위한 카르타고의 도전이었지만, 3차전은 로마가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한 차원에서 시작됐다.
전쟁의 발단은 늘 그렇듯, 주변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 카르타고가 로마의 허락없이 전쟁을 해서는 안되는 약점을 이용해 카르타고 옆 누미디아가 국경을 넘어 카르타고를 괴롭혔다. 카르타고는 견디다 못해 로마의 허락 없이 전쟁에 들어갔고.... 로마는 약속 위반을 구실로 카르타고로 쳐들어갔다. 로마와 싸울 능력도 의사도 없던 카르타고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호소했지만, 백여년 뒤 로마의 카이사르가 써먹게 될 말 처럼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로마는 모든 카르타고 시민에게 해안에서 10마일 이상 떨어진 육지로 들어가 살라고 명했다. 북아프리카 실정을 모르면 이는 그리 무리한 요구가 아닌 것 처럼 보인다. 먼저, 카르타고는 무역국가다. 항구를 떠나서는 살수 없다. 무엇보다 북아프리카는 해안에 접한 좁은 지역만 비옥할 뿐 내륙으로 들어가면 무더위와 가뭄에 농사지을 여건이 못된다. 북아프리카를 탐방하면서 이런 현실을 정확히 볼수 있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최후의 1인까지 싸우자. 카르타고는 B.C 149년부터 4년 동안 농성하며 버텼지만, 카르타고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B.C 202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군을 무찌르고 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大스키피오)의 손자(장남의 양자)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小스키피오)가 카르타고를 완전히 박살내고 말았다. 카르타고의 모든 건축물은 17일 동안 불타며 파괴된 채 버려졌고,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노예로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