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인민군으로 6.25때 장렬히 전사했다는 사실 때문에 평양에서 잘 살고 있는 김선호(차승원)는 만수대 예술단의 호른 주자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예쁘면서도 동치미 국물같이 시원하고 씩씩한 성격의 연화(조이진)와 결혼을 약속하고 사랑을 쌓아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전사한 줄 알고 있던 할아버지가 남쪽에 살아계시다는 전갈을 받고 은밀하게 편지왕래를 하다가 편지 왕래 사실을 당국이 적발한 낌새가 느껴지자 수용소에 끌려가느니 차라리 할아버지 만나보고 죽겠다는 각오로 가족 모두가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합니다.
선호는 연화에게 함께 탈출하자고 권유하지만 연화는 부모님께 잘 말씀드리고 뒤따라가겠다고, 자신을 데리러 사람을 꼭 보내라고 약속하고 헤어집니다. 천신만고 끝에 남한에 도착하지만 그사이 자본가였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남쪽의 가족들은 차가운 눈초리로 대합니다.
선호 가족은 북한 음식을 파는 작은 식당을 차려 생계를 꾸려나가고 선호는 꿈에도 잊지 못하는 연인 연화를 데려오기 위해 다달이 나오는 정착금 통장 깡을 통해 마련한 목돈으로 전문가를 만나 작업에 착수합니다. 하지만 이 전문가는 탈북자를 상대로 등을 쳐먹는 전문 사기꾼이어서 연화를 데려오지도 못하고 돈만 날리고 오히려 봉변을 당합니다.
실의에 빠져있는 나날이 지나는데 북에 있는 연화가 결혼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절망하고 원망하다가 자신의 아픈 상처와 처지를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치킨집 여사장 경주(심혜진)와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립니다. 연화와의 기억도 가물가물 해질 무렵 TV 뉴스에서 대규모 탈북자들이 남한에 도착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그 가운데 뜻밖에 연화가 포함됐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휩싸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아이작 싱어의 소설을 영화화했던 [적, 그리고 사랑이야기]가 생각나더군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가족이 몰살당한 주인공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충실한 하녀와 결혼한 상태에서, 나치 수용소를 탈출한 유부녀와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며 연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데, 죽은 줄 알았던 옛 부인이 나타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린 영화로 레나 올린의 매력이 돋보였던 작품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바람둥이 같지만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한 개인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의 아이러니를 통해 역사의 비극을 잘 조명한 영화였습니다.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서 순진한 탈북자들은 쉽게 사기를 당하고 먹고 살기 위해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이름으로 술집 삐끼를 하는 등 북한에서 가져온 이미지를 상품화해서 먹고 살아야하는 모습 등을 통해 리얼리티를 높여줍니다. 외국인 노동자 같은 완벽한 이방인도 아니면서 영화 속에서 언급하듯이 연변 출신이라고도 할 수 있고, 강원도 출신이라고 둘러대기도 하는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 아닌 아웃사이더의 슬프고 가슴 아픈 사랑을 감정의 과잉에 휩쓸리지 않고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드라마 피디 출신답게 영상이나 이미지보다는 대사와 상황 설명, 관습적인 화면 컷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아쉬움이 있지만 평양시가지나 옥류관 등 미술과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북한 거리와 풍물 모습의 재현은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또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꼼꼼한 취재를 통해 그들이 새 사회에서 살아나가는 모습 들을 가감없이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차승원은 갈곳없고 의지할데 없는 자신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준 남쪽 여자와 자신만 바라보고 목숨을 걸고 탈출해 온 북쪽 여자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을 측은하고 처량하게 잘 표현해냅니다. 심혜진의 튀지 않는 안정적인 연기도 돋보이지만 솔직하기도 하고 당돌하기도 한 북한 여성 연화를 연기한 조이진의 발견이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