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며칠 황사가 기승을 부리더니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았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저는 지난주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올 여름 한국 초연 무대를 앞두고 있는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영국 공연을 취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스 사이공' 취재와 함께 영국 뮤지컬의 요즘 경향까지 함께 볼 수 있어서 유익한 출장이었습니다. 이번에 본 공연 얘기를 한꺼번에 다 하고 싶지만, 시간 나는 대로 하나씩 정리해 나갈 생각입니다. 오늘은 미스 사이공 얘깁니다.
미스 사이공은 현재 영국 버밍엄에 있는 2천석 규모의 극장, 히포드롬 시어터에서 공연되고 있습니다. 2년째유럽과 영국 투어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지요.
1989년 런던에서 초연됐을 때와는 달라진 버전입니다. 무대장치도, 연출도, 바뀌었습니다. 저는 '미스 사이공'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 오리지널 프로덕션과 뭐가 차이 나는지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번 프로덕션은 무대의 '사이즈'는 줄어든 반면, 드라마는 훨씬 강화된 게 특징이라고 합니다.사실 '미스 사이공', 하면 외국에서 보고 온 사람들이 이구동성, '야, 무대 위에 진짜 헬리콥터가 뜬다니까' 할 정도로, 헬리콥터 장면이 유명합니다. 미군들이 베트남 전에서 철수하는 장면인데요, 주인공 크리스와 킴이 하룻밤 운명적인 사랑을 나눈 뒤 헤어지게 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제가 본 프로덕션은 바로 이 장면이 3D 영상으로 바뀌었습니다. 헬리콥터 실물 크기의 무대 장치를 계속 유지하면서 투어 공연까지 하기에는 너무 돈이 많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공연계에서는 '미스 사이공'의 한국 초연이 오리지널 프로덕션이 아닌 점에 실망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영상으로 처리한 헬리콥터 장면이 얼마나 실감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던 거죠.
실제로 보고 난 소감은, 영상으로도 훌륭하게 처리됐다는 것입니다. 헬리콥터 효과음과 함께 입체 영상이 무대 앞쪽으로 다가오고, 미군 병사들이 옆에서 영상이 있는 쪽으로 뛰어내립니다. 마치 헬리콥터가 타는 모습처럼 연출됐는데, 아주 생생하고 실감 났습니다.
특히 이 장면에서는 미국 대사관의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미국행을 절규하듯 염원하는 베트남 사람들과 이를 막으려는 미군 병사들이 충돌하는데,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습으로 연출돼 생생함을 더했습니다. 연기하는 배우들이 바리케이드를 계속해서 움직이며 바이케이드 안쪽과 바깥쪽을 교차해 무대 전면에 보여줍니다.킴과 크리스는 이 장면 내내 서로 엇갈리며 만나지 못합니다. 긴박감과 속도감이 넘치는 연출에 심장 고동이 함께 고조됩니다.
이번 출장에 동행한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미스 사이공'을 예닐곱번은 봤는데, 이번 프로덕션이 오리지널과 비교해도 크게 손색 없을 정도로, 헬리콥터 탈출 장면을 실감나게 연출했다고 평가했습니다.이전과 또 달라진 장면 가운데 하나는 엔지니어가 부르는 '아메리칸 드림' 장면입니다. 원래는 실제 크기의 캐딜락이 등장했었으나, 이번에는 엔지니어의 머릿속에 흘러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압축해 보여주는 듯한, 약간 풍자적이고 상징적인 느낌의 애니메이션이 상영됩니다.
저는 이번 프로덕션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습니다. 사실미군 병사와 베트남 소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줄거리 자체가 웬지 약간불편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킴의 비극적인 사랑과 운명에는 저도 모르게 몰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킴과 크리스 사이에 태어난어린 아들 탐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무표정에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국에서 같이 간 사람들 중특히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눈물을 흘렸습니다. 영국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미스 사이공의 영국 공연에는한국인 배우 손지원 씨(김성녀. 손진책 씨의 딸)가 출연하고 있습니다.
손지원 씨는 비중있는 조역인 지지 언더스터디와 앙상블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공연을 본 날에는 지지 역으로 출연했습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영국 무대에서 한국인 배우를 만나는 것 자체가 무척 반가왔습니다.
(옆의 사진은 히포드롬 시어터백스테이지에 붙어있는 '미스 사이공' 포스터 앞에서 기념 촬영한 것입니다. 출연배우들의 사인으로 가득 차 있는 공연 포스터인데, 자세히 보면 '손지원'이라는 한글 사인도 보입니다.)
다른 배우들 중에는 엔지니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미스 사이공'의 진정한 주인공은 킴과 크리스가 아니라, 엔지니어라고 할 정도로, 이 작품에서 엔지니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척 큽니다. 마지막 커튼 콜 때도 엔지니어가 맨 마지막으로 나와 관객의 환호에 답할 정도지요.
엔지니어는 비굴하고 간사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극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킴이 크리스 사이에 낳은 아들 탐이 자신이 꿈에 그리던 미국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엔지니어가 탐을 안아올리면서 '내 손 안의 패스포트'라고 노래하는 장면이 있는데, 희극적인 장면이라 웃음이 나오면서도 일그러진 아메리칸 드림의 끈질김에 소름이 끼치기도 했습니다.
한국 공연에서는 엔지니어 역을 중견 뮤지컬 배우 김성기 씨가 맡게 됩니다. 그의 연기가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새로운 프로덕션을 연출한 로렌스 코너는 한국 공연의 연출도 맡게 됩니다. 본래연극을 하던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드라마에 집중하는 연출력이 탁월해 보였습니다. 그는 '헬리콥터 장면'에서 실물이 등장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사람들이 아쉬워하지만, '대규모 무대 세트가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며, 새로운 프로덕션에서 강화된 스토리에 주목해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특정 뮤지컬 제목만 들어도 떠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샹들리에 장면, 그리고 미스 사이공에서 헬리콥터 장면이 그런 것들이죠. 하지만 이 장면은 '한 순간'입니다. 그리고 미스 사이공에는 이 장면 말고도 '수많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는 새 프로덕션을 만든 것이, 경제성 측면에서 무대 장치를 간소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연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작품 자체가 새롭게 손질될 필요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미스 사이공'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으며, 이 조치는 적절한 때 이뤄졌다고 했습니다.
원종원 교수의 말을 다시 빌리면, 오리지널 프로덕션은 베트남 사이공까지도 아주 예쁘고 화려한 세트로 그려졌다는 느낌이었지만, 이번에는 무대 세트나 의상 등에서 현실감이 강화된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사이공의 나이트 클럽 '드림 랜드'를 묘사한 첫 장면은, 화려하다는 말보다는 징그럽게 현실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징그럽게 현실적이라서, 더욱 몽롱한 환각 속 세계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악몽 같은 현실 속에서 킴은 크리스와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전세계에서 3천만명 이상의 관객들을 끌어들였다는'미스 사이공'의 인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영국 버밍엄 공연은 날마다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합니다.
한국 공연에서도 이런 인기가 지속될까요. 뮤지컬 빅 4 중 마지막으로 선보이는 화제작이라, 벌써부터 예매율이 상당히 높다는 얘기가 들립니다.
제가 영국 현지에서 확인한 '미스 사이공'은 초연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매력이 충분한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영국 공연장보다 훨씬 무대 사이즈가 크고 객석과 무대간 거리가 먼 한국의 공연장에서도 새 프로덕션의 무대 장치가 현지에서만큼 실감나게 보일지, 그리고 섬세한 연출이 제대로 빛날지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아, 물론 이 모든 것에 앞서, 한국인 배우들의 연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또 뵙겠습니다. 아무래도 영국 출장 다녀온 얘기를 다 하려면 편지를 여러 통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자란 것은 제 블로그http://ublog.sbs.co.kr/shkim0423
에 올려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