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2월도 벌써 중순이 지났습니다. 요즘은 정말 봄이 서서히 오고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년 겪는 것이지만, 계절의 변화란 정말 희한합니다. 야근하느라 저녁 6시가 넘어 출근하면서 바깥이 아직도 환한 것을 보고 새삼 놀랐었습니다. 낮이 많이 길어진 것이죠.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공연이 1주일 남았습니다. 지난해 초연 때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뮤지컬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이 뮤지컬의 배우들을 인터뷰하고 나서 쓴 글을 여기 보내드립니다. 세종문화회관 월간지 '문화공간' 2월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저는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 비하면 '비주류'인 프랑스 뮤지컬이 한국 관객들에게 이렇게 사랑 받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이 뮤지컬은 영국 공연 때는 '이게 무슨 뮤지컬이냐' '재난'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똑같이 '뮤지컬'이라도 나라마다 얼마나 취향이 다르고, 정서가 다른지, 실감합니다. )
노트르담 드 파리를 시작으로 십계, 벽을 뚫는 남자, 챈스 등 프랑스 뮤지컬이 줄줄이 우리 나라에 상륙합니다. 이 뮤지컬들이 다 한국 시장에서성공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건 '며느리도 모르는'일입니다.^^)
다만 프랑스 뮤지컬들의 공연이 단순히 제작자들이 '새로운 상품'을 찾아낸 데 그치지 않고, 영미권 뮤지컬에 치우쳤던 우리 공연계에 신선한 자극이 됐으면 합니다. 또 우리 창작 뮤지컬에 대해서도 좀 더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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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가 한국을 다시 찾아왔다. 지난해 한국 초연에서 프랑스 뮤지컬의 매력을 한껏 선보이며 8만 한국 관객을 열광시킨 작품이다. 초연이 끝나고서도 많은 관객들이 마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같은 이 뮤지컬의 중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팬클럽이 생겨난 것은 물론이고, 다시 공연을 보기 위해 대만으로, 파리로, ‘해외 원정’을 불사한 팬들도 많았다. 그러고 보면 1년이 채 안 돼 성사된 앙코르 공연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까.
앙코르 공연 개막 이틀 전, ‘노트르담 드 파리’의 배우들을 만났다. 맷 로랑(콰지모도 역)과 나디아 벨(에스메랄다 역), 로랑 방(페뷔스 역), 제롬 콜렛(프롤로&콰지모도 역), 로디 줄리엔느(클로팽 역), 이렇게 5명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모두 지난해 한국 공연에 참여했던 배우들이다. 이들 역시 한국 관객들만큼이나 두 번째 한국 공연을 기다려왔다고 했다.
“한국에 다시 오게 돼서 정말 기쁘고 만족스러워요. 이렇게 다시 오게 된 것 자체가 한국 관객들이 노트르담 드 파리를 그만큼 사랑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나디아 벨)
“이번에는 공항에 내려서 차 타고 오는데 마치 고향에 가족을 만나러 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모나 삼촌, 조카를 만나러 오는 것 같았어요.”(맷 로랑)
로랑 방은 지난해 공연에서, 프랑스어 가사를 관객들이 잘 알아듣지는 못할 텐데도, 너무나 집중해서 듣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며, 무대 위에서도 객석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과연 그랬다. 관객들은 무대에 푹 빠졌다. 프랑스어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뮤지컬의 서곡 ‘대성당의 시대’에서부터 귀를 쫑긋 세웠다. 리샤르 코시앙뜨가 작곡한 노래들은 때로는 감미롭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배우들은 대사 하나 없이 오로지 노래만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배우들은 ‘노트르담 드 파리’와 다른 뮤지컬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음악이라고 입을 모았다. 또 프랑스 뮤지컬이 세계 시장에서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따라가지 않고서도 큰 성공을 거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드러냈다.
“일반적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텍스트 위주로 진행된다면, 이 작품은 그야말로 ‘뮤지컬’, 노래만으로 이뤄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공연입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큰 차이점이 있지요.”(나디아 벨)
“1998년 ‘노트르담 드 파리’가 선보이면서 프랑스에서 노래만으로 이뤄진 뮤지컬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노트르담 드 파리’ 이후, 노래만으로 진행되는 대작이 10여 편 제작됐습니다. 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고요. 이런 작품에 참여하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로랑 방)
음악 뿐 아니다. 모든 게 달랐다. 연출을 맡은 전방위 예술가 질 마으는 15세기 말 파리의 모습을 고증을 통해 재현하기보다는, 현대적인 느낌의 무대 속으로 끌어오는 방식을 택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감옥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거대한 벽 같은 무대 장치는 단순해 보이지만, 묵직한 존재감과 상징으로 다가온다.
일반적인 뮤지컬에서는 배우가 춤도 추고 노래도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노래하는 배우와 춤추는 무용수를 분리했다. 그래서 이 뮤지컬은 때로는 콘서트 같기도 하고, 때로는 무용 공연 같기도 하다. 무용수들은 대성당의 벽을 타고, 허공에서 거대한 종을 타고 내려오고, 무대를 종횡무진 가로지른다. 이들은 거리의 부랑자요, 집시요, 군인이요, 파리 시민이다. 이렇게 무용수들은 스스로 등장인물이 되기도 하고, 춤으로 배우의 내면 심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안무는 ‘퓨전’이다. 발레와 현대 무용, 브레이크 댄스와 곡예를 넘나든다. 어느 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 현대 무용의 세계적인 추세를 반영한다. 안무를 맡은 마르티노 뮐러가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에서 활동했다는 경력이 눈에 들어온다.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라면, 세계적인 무용가 지리 킬리안이 이끄는, 현대 무용의 흐름을 선도하는 단체다. 지리 킬리안에게 발탁됐던 안무가라니, 과연, 고개가 끄덕여진다.
“제가 출연하는 작품이긴 하지만, 이 공연은 정말로 멋져요. 음악과 춤, 텍스트가 다 훌륭합니다. 이 세 가지가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나디아 벨)
‘텍스트’의 훌륭함은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는 원작자 빅토르 위고에게 빚지고 있다. 뮤지컬 대본과 작사를 맡은 뤽 플라몽동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에스메랄다에 대한 꼽추 콰지모도의 순수한 사랑이 작품의 중심에 놓이긴 하지만, 단순한 사랑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15세기 말,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해 가던 당대 프랑스의 격동이 읽힌다. 신과 인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권력자와 민중의 이야기가 넘실댄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15세기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존재하는 거리의 가난한 사람들, 방랑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는 일들이지요.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뮤지컬은, 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아주 심각한 작품이기도 합니다.”(맷 로랑)
맷 로랑은 ‘노트르담의 파리’ 뿐 아니라 대부분의 뮤지컬들이 결국 당대 사회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라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꼽추 콰지모도로 분장하지 않은 맨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다. 콰지모도 분장을 하고 연기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했더니, 전혀 그렇지 않단다. 그리고 얼굴 분장은 좋은 크림으로 얼른 지우면 된다며 웃는다. 콰지모도의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콰지모도에게 에스메랄다는 첫사랑이었지요. 첫사랑은 순수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사랑과 같지요. 그래서 집착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비극적'이라기보다는 ’극단적‘인 사랑이라고 해야겠지요. 죽음에까지 이르는 사랑입니다.”
극단적인 사랑이라는 면에서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프롤로 신부도 마찬가지다. 광장에서 춤추는 에스메랄다를 보고, 금지된 정열에 휩싸인다. 그리고 파멸을 예감한다. 프롤로의 사랑을 설명하던 제롬 콜렛은, 작품 속에서는 콰지모도가 프롤로를 죽이는데, 그렇지 않았더라도 프롤로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라고 했다.
“프롤로라는 인물은 학문과 종교밖에 몰랐죠. 사랑, 여자,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르던 사람입니다. 적어도 에스메랄다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죠. 에스메랄다는 성직자로서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것들을 상징합니다. ‘사랑’과 ‘관능’이죠. 프롤로는 ‘성직자에게 금지된 것’과 사랑에 빠진 겁니다. 이 사랑은 급기야 광기에 이르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랑입니다.”
클로팽 역의 로디 줄리엔느가 다시 한 번 한국 관객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는 한국에서 팬들이 파리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이제는 팬들과 이메일도 주고받고 있다며, 이번 공연에서도 한국 관객들의 열정을 느끼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이틀 뒤였던 앙코르 공연 개막일. 초연 때의 감흥은 식지 않았다. 관객은 앙코르 공연에 열광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듯 했다. 배우들의 열창이 한 곡 한 곡 끝날 때마다 우레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졌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배우들의 무대 인사가 시작되자마자 대부분의 관객들이 기립했다.
그랭그와르 역의 리샤르 샤레스트는 많이 연습한 듯, 또렷한 한국어 발음으로 관객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대성당의 시대’를 앙코르 곡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공연할 때는 모든 관객들이 한 목소리로 따라 부르는 노래다. 2001년 파리 모가도르 극장에서 공연을 보러 갔다가 이런 장면을 목격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뮤지컬이 ‘프랑스의 국민 뮤지컬’로 불리는 것을 실감하게 한 장면이었다.
프랑스어가 낯선 한국 관객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마 많은 관객들이 멜로디만은 이미 외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객석의 열기는 프랑스 관객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랄 것이 없었다. 공연장을 나서면서 보니, 출연자 출입구 앞에 배우들을 보기 위해 팬들이 늘어서 있다. 모두 상기되고 행복한 표정들이다. 배우들이 인터뷰 때 밝혔던 소망이 이뤄진 것을 현장에서 확인한 셈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에 대한 한국 관객들의 사랑은, 물론 작품이 좋기 때문이다. 또 그 동안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주로 접하며 ‘뭔가 다른 것’을 갈망해온 관객들의 욕구를 충족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득 ‘우리는 언제쯤 이런 뮤지컬을 갖게 될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면, 너무 진부한가. 진부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프랑스식 ‘나의 성공의 비결’을 보여준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고, ‘한국의 창작 뮤지컬이 사는 법‘이 궁금해졌으니 말이다.